“한국 산업의 혁신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 어느 순간부터 ‘다음에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 자체가 사라졌다.”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 부문을 이끌며 글로벌 TV 시장점유율 1위를 견인한 김현석 산업통상자원부 R&D(연구개발) 전략기획단장은 한국 경제 위기의 본질적인 이유로 ‘사라진 혁신성’을 꼽았다. 엔지니어 출신인 김 단장은 삼성전자에서 영상디스플레이부사업부장 사장, CE 부문장 겸 대표이사, 미래기술 부문 상임고문을 지냈고, 지난 5월 말 산업부 R&D 전략기획단 단장에 선임됐다. R&D 전략기획단은 정부의 산업·에너지 분야 R&D 전략 수립과 투자 방향을 기획하고 성과 관리 체계 설계를 총괄하는 조직이다. 

김 단장은 6월 20일 서울 서초구 전략기획단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국내 산업의 혁신성이 떨어지는 이유로 데이터 활용 규제를 꼬집었다. 그는 “데이터가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우리가 정작 데이터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다”며 “개인정보 보호만 강조하다 보니 데이터를 거의 못 쓰게 해놨다”라고 했다. 

이어 “중국은 데이터를 장사나 서비스 도구로 본다”며 “중국 인공지능(AI) 산업이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는 인력, 투자도 있지만 무엇보다 데이터가 있다”라고 했다.

김 단장은 한국의 AI 기술 역량에 대해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고 평가하면서 산업별 특화 AI 개발에 한국이 주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지금 논의되는 소버린 AI (Sovereign AI·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AI)가 공공재로서 의미 있을 순 있지만, 산업 전체를 이끄는 전략이 되긴 어렵다”라면서 “범용 모델 말고, 각 산업에 맞는 실용적인 AI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김현석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장 - 서울대 제어계측공학,  
전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전 삼성전자 소비자가전 부문장 / 사진 조인원 기자
김현석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장 - 서울대 제어계측공학, 전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전 삼성전자 소비자가전 부문장 / 사진 조인원 기자

삼성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고, 공직은 언제 제안받았나.

“삼성전자를 떠난 지 이제 6개월 정도 됐다. 올해 초 비상근 고문으로 넘어갈 때가 되니까 딱 맞춰 연락이 왔다. 과거 정부와 프로젝트를 같이한 적이 있는데, 당시 제출한 보고서 내용을 실제로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어떤 프로젝트였는지.

“2022년 말 진행한 ‘산업 대전환 방안’ 과제였다. 3개월만 한다며 시작했는데 대통령 해외 일정 등으로 보고가 지연되며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됐다.”

당시 보고서에 어떤 내용을 담았나.

“보고서 결론은 ‘한국 산업의 혁신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다. 새로운 것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한국의 미래를 만들거나 경쟁력을 확보할 혁신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국가 경제성장률이 심각한 저성장 기조로 갈 것이라고 진단했고, 정부와 기업체 간 R&D 협력이 잘 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혁신이 사라진 이유는.

“2000년대까지는 ‘패스트 팔로(재빠른 추격자)’ 전략이 있었다. 그게 곧 혁신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음에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사라졌다. 그사이 미국 같은 나라는 플랫폼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하드웨어에 머물러 있다.”

하드웨어에 집중하지 말아야 했다는 건가.

“원래 미국도 제조업 중심이었다. 이후 제조는 일본과 한국에 넘기고, 소프트웨어로 넘어갔다. 대표적인 게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스마트폰 출시를 새로운 하드웨어 시장으로 봤지만, 미국은 플랫폼 시장으로 이해했다. 이커머스를 비롯해 세계적인 모바일 플랫폼 모두를 미국이 장악한 배경이다. 우리도 네이버·카카오·쿠팡 같은 플랫폼 기업이 있긴 하지만, 정작 플랫폼 기반 서비스는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하드웨어에만 집중한 걸 지적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넓게 봐야 했다는 얘기다. 특히 이 과정에서 데이터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데이터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개인정보 보호만 강조하다 보니 데이터를 거의 못 쓰게 해놨다. 중국은 다르다. 데이터를 기술이 아니라 장사나 서비스 도구로 본다. 중국 AI 산업이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 인력·투자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데이터가 있었다.”

데이터 규제가 심각한가.

“우리나라는 데이터를 활용하기 너무 어려운 나라다. 정부에는 데이터가 엄청 많은데, 그걸 개방하지 않는다. 개발자로선 정말 중요한 게 데이터다.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니까 일단 막자’는 논리에서 규제는 출발한다. 책임지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다.”

'정부·기업 간 R&D 협력이 잘 안되고 있다'고 진단했는데.

“우리나라는 원래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R&D해 온 나라다. 초기 반도체,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도 정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따로 놀기 시작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부 R&D 지원이 중소·중견기업 중심으로 바뀌면서 대기업과 괴리가 생겼다고 본다. 국내 산업은 여전히 대기업 중심이다. 중소기업도 그 생태계 안에 있다. 자금과 인력이 부족해 중소기업이 스스로 R&D를 주도하기 어렵다. 정부가 과제를 줘도 제품화가 쉽지 않다. 주려는 쪽과 받으려는 쪽의 기대와 관점이 달랐던 것 같다.”

적극적인 지원이 아쉽다는 말로 들린다.

“정부와 기업의 핵심성과지표(KPI)가 다른 것 같다. 정부에선 ‘이 정도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고, 기업에선 ‘이 정도만으로는 내가 실제 쓸 수 있는 수준이 안 돼’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하는 R&D도 기업 주도로 해야 한다. KPI를 기업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바뀌어여 하나.

“기업과 정부의 R&D에 관한 생각이 같아져야 한다. 학술적 성과와 산업적 성과 모두 중요하다. 여러 곳에 나눠 주기 위해 R&D 과제를 미세하게 쪼개는 것도 바꿔야 한다. 한 명이 소규모 프로젝트를 여러 개 하는 구조가 아니라, 몇백억, 몇천억원짜리 과제에 연구원이 여럿 붙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의 AI 수준은.

“이제 걸음마 뗀 수준이다. ‘혁신이 사라진 십수 년’이 초래한 현실이다. ‘AI 3대 강국’이 목표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세계 수준이 1등인 미국과 2등인 중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고만고만하다. 이 상황에서 3등은 큰 의미가 없다.”

국가 주도 AI 개발 방향은 어떻게 보나.

“지금 논의되는 소버린 AI가 공공재로서 의미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산업 전체를 이끄는 전략이 되긴 어렵다. 우리가 우선해야 할 건, 산업별 특화 AI, 즉 도메인 스페시픽 생성 AI 개발이다. 각 산업에 맞는 실용적인 AI를 목표로 구체적인 로드맵을 세워야 한다.”

속도가 더디다는 지적이 많은데.

“국가 예산 프로세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어떤 산업에 투자하자고 제안이 들어와도 예산에 반영되려면, 2년 반이 걸린다. 올해 예산은 작년에 짠 거고, 작년 예산은 재작년에 수요를 발굴해서 만들었다. 산업이 이미 바뀌고 난 다음 예산이 따라가는 구조다.”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

“기업은 먼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나중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정부는 심의부터 하고, 결정은 훨씬 뒤에 한다. ‘선 집행, 후 책임’ 체계로 가야 한다. 결정하고 집행하는 속도가 경쟁력인 시대다.” 

윤희훈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