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5년 하반기가 시작하며 자본시장에서 유동성이라는 단어가 화두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오랜만에 다시 나온 반가운 유동성이다. 정부와 금융 당국은 시장 전반에 수십조원 규모의 자금을 직접 투입할 준비를 마쳤고 유동성 공급은 이제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금융위원회는 종합금융투자사업자(종투사)의 발행 어음 인가 확대와 함께 해당 자금 10~25%를 모험 자본에 투자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며 은행권 출자자(LP)도 이에 발맞춰 연이어 시장에 복귀하고 있다. 국민연금도 대규모 매도세를 줄이는 방편의 일환으로 전략적 자산 배분 비중 조정에 유연성을 발휘하고, 보험사는 채권 편입을 줄이며 대체 투자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유동성 투입의 흐름은 정치적인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투자 구조의 전환이며 향후 3년은 지속될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라는 것에 투자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시장은 단기 자금의 회귀를 넘어서서전반적인 포트폴리오의 자산 배분 전략이 위험 회피에서 모험 자본으로 태세를 전환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부는 단순히 돈만 푼 것이 아니라 그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까지 답안지를 제시했다. 그 답안지는 바로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초격차 10대 산업이다. 시스템 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 모빌리티, 친환경 에너지, 로봇, 빅데이터·인공지능(AI), 사이버보안·네트워크, 우주항공·해양, 차세대 원전, 양자 기술이 이에 속한다.
정부가 표명한 대로 이는 정책·예산·규제· 투자 방향이 집중적으로 투입될 투자 지도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아예 투자 좌표까지 찍고 있는 셈이다. 유동성은 주어졌고 투자 방향은 지정됐다. 새 정부가 들어선 기대감과 함께 정부가 내놓은 답안지를 풀어보자.

창업 장려 이상의 다층적 산업 지원
우선 어떤 맥락에서 나온 정책일까. 중소벤처기업부는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상기 10대 신산업 분야에서 국가 경제의 미래를 이끌어갈 딥테크(심층 기술) 스타트업 1000개 이상을 육성하고 글로벌 시장의 핵심 주역으로 성장시키는 ‘초격차 스타트업 1000+’ 프로젝트를 추진해 오고 있다. 정부가 신산업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한딥테크 스타트업을 선정해 기술 사업화, 개방형 혁신, 투자 유치 등을 통해 글로벌 진출에 집중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책이다. 2023년부터 현재까지 407개 초격차 스타트업을 선발해 집중 지원한 결과, 매출 30.3%, 누적 투자액이 16.7% 증가했으며 12개 사는 기술 특례 상장 제도를 활용해 이미 코스닥에 상장했다고 한다.
지난 6월 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2025년 제2회 추가경정예산안으로 총 2057억원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 가운데 1000억원을 AI 혁신 펀드에 투입한다고 한다. 또한 연구개발(R&D) 과제에 국한되지 않고 기술 사업화 자금, 수출 바우처, 규제 특례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한다고 한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AI·딥테크 스타트업을 전면에 내세워서 단순히 기존 산업에 AI를 접목하는 수준이 아니라 AI 그 자체가 사업의 본질이거나 심층 기술을 중심으로 한 하드웨어·소재·설계·알고리즘 등 근본 기술 산업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은 AI 등 첨단 기술 산업 전반 확산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며 스타트업을 집중 육성해 지역·중소기업 중심의 AI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정부 정책은 기존과는 달리 단순히 창업 장려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기술 산업화 자금은 물론, 수출 바우처, 규제 특례, 공공 조달 연계, 글로벌 진출 지원 등 다층적인 정책 도구가 총동원된다.
이런 방향은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때문이다. 특히 이제 산업 정책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금기를 깨고 전 세계적으로 정부가 기술 경쟁에 직접 뛰어들고 있다. 기존 산업 정책에서 정부는 방향만 제시하고 민간이 자율적으로 경쟁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면, 이제는 각국 정부가 직접 돈을 싸 들고 나서고 있는 형국이다.
글로벌 시장은 공급망 재편, 기술 블로킹(차단), 보호주의 심화로 인해 빨리 선점하지 못하면 기술을 꽃피울 수조차 없게 돼 버렸다. 패스트 팔로어 전략은 이제 서 있을 곳이 없다. 과거처럼 선진국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더 빠르게,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성장 모델은 통하지 않는다.
정부의 산업 재편 의지 읽어내야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시대다. 반도체 공급망은 정치화됐고, 에너지 안보는 지정학의 연장선이 됐으며, AI는 일상의 영역을 넘어 군사·의료·금융까지 침투하고 있다. 과거 혁신 성장이나 디지털 전환처럼 추상적 키워드가 주를 이뤘다면, 이제는 기술 분야가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는 정책·예산·규제 측면에서 전방위적 자원이 투입될 우선순위 산업이 추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장은 유기적이고 기술은 예측 불가능하며 경제는 통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원대한 포부를 단순히 정책적 지원으로 이해하기보다 산업 체계 변화를 표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AI 등 첨단 기술이 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데 이에 적응하지 못하면 기존 산업 전체 경쟁력이 급격히 저하된다는 사회 전반적인 위기감이 반영돼 있다. 또한 창업 10년 이내의 유망 스타트업을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육성하고 서울·수도권·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넘어서 지역 중심의 AI 대전환을 이뤄내 글로벌 경쟁력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책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시장은 이에 민첩하게 반응해야 한다. 기술 수용이 시급하고 스타트업 생태계가 재편되며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정치적 필요가 만나는 지점을 잘 공략해야 한다. 정부의산업 전환을 이제까지 이루어졌던 스타트업 육성 정책으로만 보고 정치적으로 또는 단편적으로만 해석한다면, 더 큰 산업적 흐름을 놓칠 수 있다. 산업 개편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한 속도전과 수도권 중심 산업 질서를 지역 기반으로 재배열하려는 정치적 의지 등을 함께 읽어서 투자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 흐름은 증시 상장 제도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다. 7월 1일 비공개로 열린 한국거래소와 증권사 투자은행(IB) 간담회에서 기술 특례 상장 제도의 본래 취지를 살리려는 정부 의지가 재확인됐다. 기술 특례 상장 제도가 단순히 상장을 위한 우회 트랙이 아니라 첨단산업 기술력을 공정하게 평가해 기술력 있는 기업이 자본시장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취지를 살리는 데 더 주력하겠다는 것이 한국거래소의 분명한 메시지라는 것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기술 혁신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기술도 산업도 매우 빠르게 발전한다. 정부도 그 방향을 향해 뛰어가겠다고 한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 국민연금, 은행 등이 일제히 시장과 제도, 자본, 심사 체계까지 재정렬해 같이 발맞춰 뛴다고 한다. 투자자도 이 속도에 너무 늦지 않게 합류해 그 결실을 향유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