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대 초반의 한 중년 부부는 서로 생활 패턴이 다르다. 아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남편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어느 날 올빼미 남편이 종달새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 각방 쓸까?” 순간, 아내 표정이 얼어붙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도 ‘각방’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단순한 잠자리 문제가 아니다. 이 단어는 관계의 거리, 애정의 농도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제안이지만 그래서 더 상처가 클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이불을 덮고 잔다’, 한국인에게 이 말은 부부 사이의 친밀함을 상징한다. 같은 공간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의례고 안정감이며 사랑을 표현하는 무언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각방을 제안받는 순간, 많은 사람은 먼저 정서적인 위협을 느낀다. ‘정이 떨어졌나’ ‘이제 나랑 잠자고 싶지 않은 거야’, 복잡한 감정의 파장이 물밀듯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난 ‘형태’가 아닌 내적인 ‘의도’다. 각방을 먼저 제안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남편이 먼저 제안하는 경우 주로 코골이, 뒤척임, 수면 패턴 차이 같은 이유를 든다. 남편은 이런 생리적 이유를 들어 말하면 상처를 덜 줄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로서는 그 말이 다르게 들릴 수 있다. ‘혹시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아닐까’, 정서적 연결에 더 민감한 쪽은 보통 여성이다. 이는 진화심리학적으로도 설명된다. 과거 생존 전략상 여성은 관계 유지와 정서적 안정에서 안전을 느끼는 경향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방’은 여전히 사랑의 증표처럼 느껴질 수 있다.
공간보다 중요한 건 거리 안에 담긴 ‘마음의 온도’
여기서 자기 분화(self-differentiation)가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가족 치료 이론가였던 머리 보언에 따르면, 자기 분화가 잘되는 사람은 상대 감정과 자기 감정을 구별해 받아들인다. 자기 분화가 잘되지 않는 사람일수록 ‘상대의 행동 = 나에 대한 평가’로 해석하기 쉽다. 단순한 수면 공간 변화가 자존감이나 정체성 위협으로까지 번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대에 따라 각방을 받아들이는 감정의 온도도 다르다. 50·60 세대 부부는 ‘부부는 한방에서 자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관이 강하게 내면화돼 있다. 각방 쓰기는 곧 사이가 틀어졌다는 신호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는 세대에 따른 가치관 차이일 수도 있고, 함께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성격 유형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외향적 감정형인 사람일수록 관계적 밀착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므로 각방이 곧 거리감으로 느껴질 수 있다. 반면 30·40 세대 맞벌이 부부는 상대적으로 현실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수면 질, 각자 공간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각방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 하루의 고단함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주로 자기 분화가 더 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감정과 현실을 분리해서 본다. 사랑과 거리 사이의 역설을 이해한다. 심리적 거리가 반드시 물리적 거리와 비례하지 않으며, 오히려 잘 조절된 거리는 관계를 더 풍부하게 만든다는 걸 보여주는 경우다.
부드럽게 각방 쓰기를 시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감정보다 환경에 집중해서 말하는 것이다. ‘요즘 잠을 자도 계속 피곤해’ ‘밤새 뒤척이느라 당신도 힘들 것 같아’, 이렇게 수면 환경이라는 객관적 이슈로 접근하면 상대는 덜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문제 원인을 배우자에게 돌리는 게 아니라, 상황에 두는 것이 키포인트다. 둘째, 말의 순서를 잘 정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옆에 있는 게 좋지만…’ ‘잠자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편하게, 회복하면 좋겠어’, 이런 표현이 먼저 나와야 각방 쓰자는 제안이 거절이 아니라 배려가 될 수 있다. 정서적 안정 기지를 먼저 제공한 후 물리적 거리를 제안해야 상대는 그 공간을 단절이 아닌 신뢰로 경험하는 것이다. 셋째, 완전한 분리가 아니라 유연한 방식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가령 일주일에 이틀만 따로 잔다든지, 주중엔 각방이고 주말엔 한방에서 자는 식으로 시범적 분리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실험적 거리 두기는 때로 관계 회복을 위한 ‘잠깐의 쉼표’가 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심리적 충격도 줄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