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31일 개봉한 김성제 감독의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은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생존을 위한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새 삶을 개척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보고타에서 단순한 생존을 넘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한다. 지구 반대편 마지막 기회의 땅에서 그가 내린 결정과 그 여정을 통해,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 경영 전략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보자.
새로운 시장, 새로운 규칙: 생존을 위한 적응 전략
주인공 국희(송중기 분)는 외환 위기로 몰락한 아버지를 따라,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향한다. 새출발을 기대했지만, 마주한 현실은 냉혹했다. 가족은 공항에서 이동 중 강도에게 전 재산을 빼앗긴다. 이 일로 의욕을 잃고 무기력해진 부모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게 된 국희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자 한인 상권을 이끄는 사업가 박 병장(권해효 분) 밑에서 일을 시작한다.
국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보고타의 시장 질서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가 모두 다른 환경에서 그는 생존을 위한 적응을 해야 했다. 이는 해외 진출 기업이 직면하는 현실과 유사하다. 새로운 시장에 진출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존 전략이 통하지 않는 이유를 분석하고, 해당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익히는 것이다.

대표적 성공 사례로 스타벅스의 중국 시장 진출을 들 수 있다. 스타벅스는 서구식 커피 문화를 그대로 들여오는 대신, 중국 전통 차(茶) 문화와 결합한 메뉴를 개발하고, 매장 분위기도 현지 소비자 취향에 맞췄다. 이처럼 철저한 맞춤형 전략을 통해 스타벅스는 중국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 반면, 세계적 기업 중에는 현지화에 실패한 사례도 많다. 일례로 월마트는 한국 소비자의 소비 패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식 운영 방식을 그대로 도입한 결과,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2006년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희 역시 보고타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현지 생존법을 체득해야 했다. 국희의 아버지와 박 병장은 전장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로 국희의 아버지가 박 병장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22세에 콜롬비아로 건너간 박 병장은 보따리장수로 시작해서 점차 영향력을 키우며 보고타의 한인 상권을 이끄는 인물이 됐다. 당시 ‘샌 안드레시토’ 시장에서 활동하던 한국 상인들은 한국에서 들여온 옷을 판매했는데, 부패한 콜롬비아 세관이 큰 장애물이었다. 박 병장은 세관 출신인 장인의 인맥을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자연스레 한인 상권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국희는 박 병장 아내가 운영하는 의류 매장에서 일하며, 품질보다 신뢰와 관계가 중시되는 보고타 상권의 특성을 체득해 갔다. 그리고 이를바탕으로 생존을 넘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며 입지를 넓혀갔다. 국희가 보고타의 경제 시스템을 분석하며 자신의 입지를 키워간 적응 과정은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려는 기업에 해당 시장 환경과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정교하게 수립해야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시장 진입 전략: 기존 틀에 머물 것인가, 새 길을 개척할 것인가
국희는 세관 브로커 수영(이희준 분)을 만나면서 고민에 빠진다. 박 병장의 후견 아래 한인 네트워크에 순응하며 안정적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독립된 입지를 구축할 것인가. 이 선택은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는 기업이 기존 지배적 플레이어(현지 기업, 유통망, 규제 등)에 순응할지, 아니면 차별화된 전략으로 독자 경쟁력을 구축할지를 결정하는 문제와 유사하다.
국희는 보고타의 부패한 세관 시스템을 파악한 뒤, 박 병장 대신 수영의 손을 잡고 더 큰 위험을 감수하는 길을 선택한다. 만약 국희가 박 병장이 구축한 질서에 순응했더라면, 안정적인 점원의 삶은 보장받았겠지만, 독자적 사업가로 성장할 기회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점원으로 만족하는 대신 큰 사업가가 되기 위해 기존 방식을 탈피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기회를 창출했다.
이는 BYD가 기존 완성차 업체가 구축한 생태계에 순응하지 않고 배터리부터 자율주행까지 독자 기술력을 확보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구축한 방식과 닮았다. BYD는 1995년 배터리 제조 업체로 출발해 국제 전기차 시장의 성장을 예측하고 배터리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테슬라 등 경쟁사가 배터리 공급 업체에 의존하는 동안 BYD는 자체 생산을 통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며 차별화된 입지를 구축했다. 이처럼 해외시장에서 독자적 경쟁력을 갖추려면,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지 소비자의 니즈를 정밀하게 파악하고, 시장의 권력 구조와 유통 시스템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윤리적 경영 vs 위험한 성장: 기업의 지속 가능성 결정하는 선택
국희는 빠르게 성장하며 부를 축적했지만, 콜롬비아 정부가 밀수 단속을 강화하자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다. 이에 국희는 한인 상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익성이 높은 밀수를 그만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밀수의 단맛에 길든 수영과 상인들은 끝까지 버티다 결국 된서리를 맞는다. 이 일을 계기로 수영 및 한인 상인들과 국희의 관계는 틀어져 버린다. 이것은 기업이 단기 이익을 좇아 비윤리적이거나 위험이 큰 전략을 선택할 경우, 장기적으로 더 큰 손실을 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 사례가 2001년 미국의 에너지 기업 엔론(Enron) 사태다. 엔론은 회계 부정을 통해 기업 가치를 부풀리며 단기적으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조작이 드러나 파산했고 경영진은 법적 처벌을 받았다. 반면, 윤리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은 장기적으로 더 큰 신뢰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일례로 파타고니아(Patagonia)는 지속 가능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으며 주목받은 기업이다. 이 기업은 제품 품질뿐만 아니라, 친환경 원료 사용과 책임 있는 공급망 구축 등 지속 가능한 경영 전략을 통해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었다. 그 결과, 단순한 아웃도어 브랜드를 넘어 지속 가능한 경영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이 사례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이 단기 수익보다 소비자와 사회로부터 얻는 신뢰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철저한 분석을 토대로 독자 경쟁력을 확보하고, 윤리 경영을 실천해야 한다. 국희는 보고타에서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의 선택으로 인해 또 다른 위기를 맞았다. 기업도 성장을 위한 기회 포착이 중요하지만, 장기 전략 없이 단기 이익만을 추구하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원하는 기업이라면 국희처럼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갖추되, 그의 실수를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국희의 보고타 여정은 글로벌 기업이 새로운 시장에서 직면하는 세 가지 전략적 딜레마와 그 해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생존을 위한 신속한 현지 적응, 성장을 위한 독자적 경쟁력 확보 그리고 장기 생존을 위한 지속 가능한 가치 창출이 그것이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를 동반한다. 그러나 그 기회를 지속 가능한 성공으로 전환하는 열쇠는 결국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