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가 맞이할 수 있는 최대이자 최악의 위협은 전쟁이다. 따라서 어느 나라이고 안보 목표를 전쟁 방지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해 국가는 자국 형편에 따라 전쟁 위협에 대응한다.
대응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유럽처럼 집단 안보 체제를 구성해 대응하기도 하고,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은 독자적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으로 성장을 시도하는 중국도 독자적인 접근을 하지만, 러시아나 북한 같은 불량 국가를 최대한 활용한다. 한국은 북한이라는 상존하는 군사 위협에 대해 미국과 동맹으로 대응한다.
놀랍게도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들이닥친 이후인 2020년대에 우리는 수많은 전쟁을 맞이했다. 전쟁 형태도 CNN 중계로 바라보던 속전속결보다는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면전으로 격화하고 있다. 전 세계는 디스토피아로 바뀌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제 질서 속 전쟁과 평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현대 국제 질서가 성립됐다. 무려 5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기록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겪은 인류는 더 이상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등 5대 승전국을 중심으로 유엔(UN)이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평화 유지에 관심 없던 미국이 유엔을 주도하면서 평화 체제가 유지됐다.
물론 유엔이 주도하는 평화는 적극적 평화는 아니었다. 적극적 평화를 구현하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스로 적극 개입해 전쟁을 멈추게 하고 침략자를 몰아내야만 했다. 유엔이 적극적 평화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딱 한 번, 한국전쟁 때였다.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 이후 소련의 불참하에 유엔 안보리는 유엔군을 결성하면서 한반도에서 침략자를 몰아내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미·소 간 냉전이 정착되면서 다시는 이러한 의미에서 유엔군은 결성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끝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그 힘을 마음껏 휘둘렀다. 1991년 걸프전에서 군사 혁신으로 이룬 속전속결의 성과는 CNN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1999년 발칸반도에서는 최첨단 항공 전력의 정밀 타격만으로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도 세르비아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2001년 9·11테러 이후 대테러 전쟁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각각 2개월 안에 굴복시키면서, 더 이상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곳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전쟁과 평화 사이, 하이브리드 위협
미국의 일방적 승리는 1990년대 수많은 국가에 미래전의 모습을 보여줬다. 모든 국가가 스마트 무기를 도입하고 정보 통신 기반의 전쟁 수행 방식을 구현하고자 했다. 물론 전 세계를 관통하는 정보 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값비싼 스마트 무기를 무한정으로 투입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많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가 그 일부라도 흉내 내고자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주한 미군과 오랫동안 같이 손발을 맞춰온 한국은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첨단산업을 기반으로 해 최대한 미국의 전쟁 수행을 모방하면서 발전해, 지금은 유럽 수준에 뒤떨어지지 않는 첨단 군사력을 만들었다. 최근 K-방산이 잘나가게 된 것도 사실 이러한 꾸준한 노력의 성과다.
한편 미국의 성공에 충격받은 2개국이 있다. 바로 중국과 러시아다. 냉전 후 미국 중심의 단극화 국제 질서가 곧 자국도 핵심 주도국이 되는 다극화 질서로 바뀔 것을 중국은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이 더욱 강력해지자 중국은 미국 군사력에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우선 A2AD(반접근 지역 거부) 전략으로,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과 공군력이 중국 영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즉 극초음속 미사일 등을 포함한 비대칭 전력으로 미국을 막아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복붙(Copy & Paste) 전략’이다. 미국이 성공적으로 개발한 무기 체계와 전술을 그대로 복사해, 싼 가격으로 양산한다. 성능은 떨어져도 군비 경쟁으로 미국에 뒤지지 않는 전력을 갖출 수 있고, 추격을 반복하다 보면 기술력과 생산력도 언제가 미국을 따라잡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하이브리드 전략’이다. 중국은 이를 삼전(三戰) 또는 초한전(超限戰)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싸우지 않고 적을 약화해, 이기는 방식이다. 삼전이란 심리전·여론전·법률전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정치적 승리를 달성하는 개념이며, 초한전이란 수단과 방식에 대한 기존 한계를 넘어서 상대방을 이긴다는 개념이다. 즉 아무리 비겁한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고 사용해 전쟁 이전에 이기겠다는 것이 바로 하이브리드 전략이다.
부지불식간에 패배시키는 전쟁
현대적 하이브리드 전략에 눈독을 들인 것은 중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불량 국가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미국을 부러워한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냉전 종식 후 급격한 경제력 및 군사력 하강으로 여러 개의 공화국으로 쪼개졌다. 공화국들은 대개 러시아와 잘 지냈지만 철저하게 러시아와 관계를 부정하는 나라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체첸이다.
캅카스 지역을 잃으면 안보와 경제가 흔들리는 러시아는 체첸 이탈을 용서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1994년과 1999년 두 차례나 전쟁을 일으키고서야 체첸을 제압할 수 있었다. 1999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 통제를 벗어난 또 다른 캅카스 국가인 조지아를 손봤다. 2008년 평화유지군을 자처한 러시아군 공격으로 조지아는 패배했다. 그리고 캅카스보다도 더 중요한 요충지인 우크라이나공화국이 반러시아 정서로 전환하자, 러시아는 2014년 총알 한 방 쏘지 않고 크림반도를 합병해 버렸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은 러시아판 하이브리드 전략의 결정체다. 러시아는 자국이 가진 모든 수단, 즉 군사력뿐만 아니라 비군사적인 요소(정치·사회·경제·문화·미디어·정보·사이버, 심지어 범죄까지)를 총동원해 현지 주민의 잠재적인 저항 성향을 끌어내 전쟁에 이르지 않고 상대를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는 전략을 만들어냈다. 이는 2012년 러시아군 총참모장으로 취임한 발레리 게라시모프가 2013년 처음 선보인 전쟁 방식이다. 러시아에선 이것을 ‘신세대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서구에서는 창안자의 이름을 본떠 ‘게라시모프 독트린’이라고 부른다.

하이브리드 위협에 취약한 민주주의 국가들
게라시모프 독트린 성공에 수많은 유럽 국가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에 만족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세력을 지원하면서 돈바스 전쟁을 일으켰다. 갑자기 내전에 휩싸인 우크라이나는 이 돈바스 지역조차 상당 부분 빼앗기면서 크림반도 탈환은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물론 돈바스의 친러 반군은 실제로 러시아군의 최신 장비를 지원받았고, 러시아군 여단 전투단까지도 파병돼 실제로는 러·우 간 싸움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경우는 오히려 러시아엔 치열한 싸움을 벌인 경우다. 한때 러시아와 갈등하면서 전쟁까지 했던 조지아는 어느새 친러 세력이 집권해 버렸다.
자국 영향권에 둬야 하는 국가의 친러 정당에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해당국을 자국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소위 민주국가에 대한 선거 개입으로 자국에 유리한 국면으로 만드는 것이 하이브리드 전략의 무서움이다.
사실 러시아는 냉전 시기 수많은 위성 공산국가를 관리하면서 그 나라를 대상으로 하이브리드 전략을 펼쳐온 공산 제국이었다. 그래서 평화와 전쟁의 중간 지대에서 다양한 공작을 펼치는 데 능하다. 국공 내전으로 집권 국민당을 붕괴시켰던 중국도 평화와 전쟁의 중간 지대에 있는 하이브리드전의 전통이 있다. 소련의 충실한 제자이자 중국의 맹우인 북한도 이러한 하이브리드전에 익숙하다. 아직 러시아나 중국만큼의 섬세함과 정교함은 부족하지만, 언제든 우리 사회를 흔들 준비가 돼 있다. 그래서 북·중·러 같은 국가를 상대할 때 우리가 언제나 그들의 타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