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브랜드는 디자이너가 바뀌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이패션 브랜드의 궁극적 지향점으로 꼽히는 ‘하우스 브랜드’. 창립 디자이너의 개성이 짙은 신진 브랜드와 달리, 하우스 브랜드는 디자이너가 바뀌어도 아이덴티티(정체성)가 유지되는 장기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뜻한다. 샤넬과 꼼데가르송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대표적인 하우스 브랜드다. 한국 패션계에서 이 도전에 가까이 다가간 브랜드 중 하나가 ‘잉크(EENK)’다.

디자이너 이혜미가 2013년 설립한 잉크는 알파벳 A부터 Z까지 각기 다른 테마로 컬렉션을 전개하는 ‘레터 프로젝트’를 통해 브랜드 고유의 서사 구조를 구축해 왔다. ‘에이 포 에스테틱(A for Aesthetics)’ ‘비 포 바인딩(B for Binding)’ ‘케이 포 니트(K for Knit)’ 등 알파벳 키워드별로 서사와 콘셉트를 연결해, 매 시즌 브랜드의 확장성과 철학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혜미 대표는 서울 용산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잉크는 디자이너 개인이 아니라 브랜드 자체로 기억되고 싶은 하우스 브랜드를 지향한다”라며 “디자인뿐 아니라 생산, 유통, 조직 문화 등 브랜드 전체 시스템이 오랫동안 지속 가능하도록 설계하고 있다”고 밝혔다.

잉크 2025 가을·겨울(FW) 런웨이 이미지. /잉크
잉크 2025 가을·겨울(FW) 런웨이 이미지. /잉크

잉크는 최근 몇 년간 글로벌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22 파리 패션위크 진출을 기점으로 루이비자아로마, 프렝땅, 레인크로퍼드, 안토니오 등 글로벌 명품 유통 채널에 진입했다. 최근엔 미국 노드스트롬과 협업 논의가 오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중동 등 보수적인 시장에서도 ‘한국적인 미학’을 모던하게 해석한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잉크의 차별화는 소재, 디테일 그리고 철학에서 비롯된다. 오간자(속이 은은하게 비치는 전통 직물), 오방색(오행 사상에 기반한 다섯 가지 기본 색상) 등 한국 전통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식이다. 최근에는 작가 김수자의 설치미술에서 영감받아 ‘바느질’과 ‘엮기’ 개념을 디자인에 적용했다. 의상 곳곳에 섬세하게 스티치 디테일을 배치하거나 직조된 원단을 겹쳐 엮는 방식으로 은유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식이다.

이 대표는 “한국의 여백과 단아함을 어떻게 동시대 패션 언어로 풀어낼지 항상 고민한다”라며 “눈에 띄지 않지만 느껴지는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깊이가 브랜드 정체성이자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이혜미 잉크(EENK) 대표-전 한섬·제일모직 디자이너,  2022 파리 패션위크 진출/잉크
이혜미 잉크(EENK) 대표-전 한섬·제일모직 디자이너, 2022 파리 패션위크 진출/잉크

이 대표는 잉크의 창작 철학에 대해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은 지양한다”며 “옷은 작품이 아니라 실용성을 갖춰야 하며, 미감과 기능성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창작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옷을 입는 사람의 움직임과 실생활을 고려한 디테일을 중시한다. 

그는 “디자인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다. 수많은 파트너와 소통을 통해 완성된다”며, 유연한 조직 운영과 팀워크가 브랜드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도 덧붙였다. 

또한 그는 글로벌 무대에서 동양의 미감과 여백의 미를 현대적으로 은은하게 녹여내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잉크 옷은 직선보다는 곡선, 과시보다는 절제에 가까운 디자인을 추구한다. 이 대표는 “동시대 글로벌 소비자에게 한국의 미학을 낯설지 않게 전하는 것이 진짜 경쟁력”이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브랜드의 실용성과 확장성도 강조했다. 히트 아이템 기반의 라인 다각화 전략을 펼치면서, 청바지와 기본 아이템, 니트류 등 주요 제품을 중심으로 고객층을 넓히고 있다. 국내에선 W컨셉 등 패션 플랫폼과 분더샵 등 유명 편집숍과 손을 잡고 성장했다. 올해 신세계백화점에 입점하는 등 백화점으로 오프라인 채널을 확장한다.

해외에서도 입지를 구축 중이다. 2018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프랑스·미국·일본 등 12개국에 진출했다. 매출 70%가 해외에서 나온다. 이 대표는 “중국에서의 빠른 성장, 일본·미국과 중동 유통 확대를 통해 연 매출 100억원 이상의 브랜드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라며 “올해 하반기에는 태국·두바이· 홍콩 등지에서 글로벌 팝업(임시 매장) 운영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잉크(EENK)의 의류 이미지. /잉크
잉크(EENK)의 의류 이미지. /잉크

제품 완성도 역시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다. 잉크는 고유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옷 자체의 퀄리티’에 집중하는 브랜드로도 통한다. 이 대표는 “중국 바이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입었을 때 더 예쁘다’라는 것”이라며 “겉보기에만 화려한 디자인이 아닌, 실루엣과 핏·착용감까지 세심하게 설계한 점이 브랜드 신뢰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인은 물론 마감과 봉제, 원단의 터치감까지 소비자 경험을 고려해 세밀하게 조율한다”라고 덧붙였다.

다만,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을 위한 숙제도 남았다. 이 대표는 “디자인뿐 아니라 인력 관리, 재무관리, 팀 빌딩 등 조직 운용 전반에 대한 고민이 많다”라며 “브랜드가 사람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어도 브랜드가 살아남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하우스 브랜드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잉크는 단기 유행에 휩쓸리는 브랜드가 아니라, 한국의 정서와 미감을 담아 세대를 넘어 사랑받을 수 있는 브랜드를 꿈꾼다”라며 “K-패션의 새로운 표준이자, ‘살아 있는 브랜드 유산(Living Heritage)’이 되기 위한 여정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효정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