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정보와 전략의 시대다. 외교·안보·기술·산업·교육·기후 등 모든 분야가 국경을 넘는다. 글로벌 질서를 읽고, 국제 무대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는 나라만이 국민의 삶을 지킬 수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보는 눈과 귀를 가진 국가 경영’ 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과거 역사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변하지 못한 조선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는 조선에 충격을 줬다. 1780년 조선 실학자 박지원은 청나라(중국)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열하(熱河·중국 허베이성 청더 일대)에 다녀왔다. 그 여정을 기록한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다. 박지원은 그곳에서 청나라가 서양 과학과 수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국가 개혁에 활용하고 있는지를 목격했다.

강희제는 특히 예수회 선교사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배우고, 수학 교재를 직접 집필해 백성에게 알렸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명화된 모습을 보고 돌아와 이를 조선에 알렸지만, 조정은 귀를 닫았다. 실학자는 변방에 보내져 경계 대상이 됐고, 청나라는 끝내 ‘오랑캐의 나라’로 치부됐다. 세계가 변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도 끝내 변화하지 않은 조선은 19세기 외세 침략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건륭제와 매카트니 사절단... 전쟁의 고통

영국 조지 3세 왕은 산업혁명이 불붙었던 1793년 청나라에 특사단을 파견했다. 바로 매카트니 사절단(Macartney Embassy)이다. 그들은 중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고 무역 확대를 요청했지만, 당시 건륭제는 “너희 나라 물건은 필요 없다”는 말로 영국의 요청을 거절했다. 중국은 여전히 자국을 세계의 중심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를 “서양 문명을 이해할 기회를 놓친 결정적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더욱 질주했다. 역사는 냉정하다고 할까. 사절단에 동행했던 부대사 스탠호프 경(Viscount Stanhope) 의 아들(당시 12세) 조지 토머스 스탠호프(George Thomas Stanhope)는 이후 영국 하원 의원이 돼 “중국은 고립돼 있고, 개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편전쟁의 정당성을 피력했고, 결국 영국은 1840년 무력으로 중국을 굴복시켰다.

영국 하원은 이 전쟁 개시안을 찬성 271, 반대 262, 단 9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영국도 도덕과 이익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마약을 팔기 위해 무기를 드는 전쟁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중국은 세계의 변화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중국은 100년 동안 긴 암흑기와 고통을 견뎌야 했다.

정약용의 유배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전략

1801년 조선에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됐다. 새로운 지식과 제도 개혁을 주장한 정약용은 ‘불온한 학문을 했다’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반면, 같은 해 미국에서는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역사를 공부한 정치가였고, 프랑스 대사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를 꿰뚫고 있었다. 

제퍼슨은 취임 직후 루이스·클라크 탐험대(Lewis and Clark Expedition)를 조직해 미 서부를 조사시켰고, 180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매입해 당시 미국 영토를 두 배로 확장했다. 이 면적은 오늘날 미국 본토 5분의 2에 해당한다. 국가 규모를 두 배로 키운 이 결정은 단 한 번의 결단에서 시작됐다.

조선은 개혁가를 유배 보냈고, 미국은 개혁가가 나라를 확장했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처벌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믿고 키우느냐’는 것이다.

日 신사유람단… 배우기 위한 여행

1871년 메이지(明治) 정부는 107명으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団·신사유람단)을 미국과 유럽 12개국에 보냈다. 무려 1년 10개월간의 탐방으로, 일본은 당시 국가 예산의 약 6%에 해당하는 큰돈을 들여 세계를 공부하러 나갔다. 사절단은 미국과 유럽의 정치, 헌법, 교육, 군사, 산업 등 각 분야를 철저히 관찰했다.

사절단이 귀국한 후 일본은 놀라운 속도로 제도를 정비했다. 헌법, 국회, 의무교육, 징병제, 철도, 중앙은행 등 근대국가를 구성하는 대부분이 이 여행 이후 도입됐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 당시 사절단에 포함된 인물은 훗날 일본을 세계 강국 반열에 올리는 주역이 됐다. 세계는 교과서보다 현장에서 배울 때 더 생생하다. 일본은 세계를 캠퍼스로 삼고 설계도를 그대로 옮겼다.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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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CIA와 헨리 키신저… 전략은 정보에서 나온다  

1947년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을 설립했다. 전 세계 정보를 수집·분석해 국가 전략을 설계하는 두뇌 기관이다. 놀라운 건 CIA가 군인, 외교관, 변호사뿐 아니라 역사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경제학자를 적극 영입했다는 점이다. 전략은 곧 문명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대표 인물이 헨리 키신저다. 유럽 외교사를 전공한 그는 냉전기 CIA와 백악관의 외교 전략가였다. ‘역사를 모르면 외교도 없다’는 그의 철학은 미국의 중국 정책, 소련 견제, 중동 정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키신저를 중심으로 조지 프리드먼(전략 분석가), 레이몽 아론(서방의 이념 정당화 이론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국가 안보 자문) 등이 전략 설계에 함께했다.

미국은 정보를 분석하고, 분석을 전략으로 바꾸는 두뇌 체계를 만들었다. 그 기반은 정보, 분석, 이성, 다양성이었다. 이것이 초강대국 미국의 핵심 엔진이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선 다섯 가지 사례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은 세계를 제대로 보고 있는가’ ‘우리는 지구 운동장 전체를 활용하는 전략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기술 전쟁, 기후 위기, 인구 위기, 지정학 리스크라는 21세기 복합 위기를 맞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국경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세계를 보는 눈과 귀 그리고 행동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전 세계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해 국가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지능망을 갖춘 정부가 돼야 한다. 해외 공관에는 군사·외교뿐 아니라 기술·인공지능(AI)·에너지 분야를 담당할 기술 부대사 제도도 본격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주요 도시에 흩어진 무역협회·코트라(KOTRA)·문화원·국민연금·한글학교 등을 통합한 ‘코리아 센터'를 운영해야한다.

또 국민 누구나 역사, 특히 세계사를 쉽게배울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 콘텐츠는 전 세계 시청자가 원하는 언어로 즐길 수 있도록 다국어 미디어 인프라로 진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 언론이 세계의 흐름, 글로벌 경제와 기술 전략을 조명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경영하는 국가가 될 수 있다. 

우리 국민은 이미 세계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서학개미는 세계의 기술과 정세를 보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는 우리 문화의 세계화 감각을 보여줬고, 챗GPT 유료 사용자 세계 2위는 우리가 가진 기술 수용의 민첩성을 상징한다. 한국이 기술과 인재, 문화 지능망을 바탕으로 국가 전략을 설계할 때, ‘경제성장’과 ‘삶의 질 향상’은 한국이 기술과 사람, 문화 지능망을 가지고 국가 전략을 설계할 때 성공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연세대 법학, 전 국회의원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보좌관,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제17·18·21대 국회의원, 전 강원도지사
이광재 전 국회 사무총장-연세대 법학, 전 국회의원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보좌관,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제17·18·21대 국회의원, 전 강원도지사
이광재 전 국회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