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북아일랜드 출신의 닐 제이고는 7월 17일(현지시각)부터 나흘간 북아일랜드 포트러시의 로열 포트러시 골프클럽(이하 로열 포트러시)에서 열렸던 ‘제153회 디오픈 챔피언십(이하 디오픈)’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했다. 9번 홀 티잉 구역으로 이동하는 작은 굴 앞에서 선수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영국 외교관 출신인 그에게 세계에서 전통이 가장 오래된 골프 축제 디오픈이 로열 포트러시에서 열리는 것은 기적이다. 그는 “1980년대 로열 포트러시 회원이었던 할아버지의 골프 백을 메고 코스를 돌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북아일랜드는 한때 세계 3대 분쟁 지역 중 하나로 꼽혔다. 중동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코소보에 버금가는 화약고였다. 북아일랜드는 30년간 이어진 종교·정치 갈등으로 3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이었던 그의 작은할아버지도 총에 맞아 사망했다.
북아일랜드 분쟁기에도 골프장에서는 화합
북아일랜드는 인구 192만 명, 면적 1만4135㎢로, 영국 4개 구성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 가운데 존재감과 경제력이 떨어지는 곳이다. 아일랜드섬이지만 영국에 속한 ‘섬 속의 섬’이다.
여기에 종교와 민족 갈등으로 1969년부터 1998년까지 30년 가까이 분쟁이 이어져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 시기 영국과 북아일랜드 무장투쟁을 주도한 IRA(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충돌이 영국 심장부 런던에서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종교와 이념의 경계는 학교와 주거지, 심지어 아이들의 놀이 공간까지 나눠 놓았다.
1998년 극적인 벨파스트 평화협정(Good Friday Agreement) 이후 평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문화·예술·스포츠는 통합의 수단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충돌의 시기에도 사람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던 공간이 있었다. 바로 골프장이었다. 골프장은 종교나 정치 성향과 무관하게 다양한 사람이 함께 플레이하며 잠시나마 서로를 ‘적’이 아닌 ‘동료’로 마주할 수 있게 해 준 중립지대였다. 제이고는 “내가 회원으로 있는 발리캐슬을 비롯해 일부 지역 골프클럽에서는 회장을 개신교와 가톨릭 출신 인사가 해마다 번갈아 맡는 등 자발적인 통합의 문화가 이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평화협정 이후 치안이 안정되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됐다. 로리 매킬로이와 그레임 맥다월, 대런 클라크 등 북아일랜드 출신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7만8000명 골프 갤러리, 포트러시에 몰려
2019년 로열 포트러시는 1951년 첫 개최 이후 68년 만에 디오픈을 다시 개최하는 감격을 누렸다. 당시 우승자는 아일랜드 출신의 셰인 라우리였다. 포트러시는 영국에 충성하는 ‘로열리스트(Royalist)’가 많은 지역이지만, 주민은 라우리의 우승에 열광했다. 도시 곳곳에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벽화가 그려졌다.
갈등과 분열을 이겨내고, 평화와 공존의 상징이 된 포트러시는 불과 6년 만에 세 번째로 디오픈을 개최하게 됐다. 디오픈을 주관하는 R&A는 9개 순회 코스 가운데 골프의 발상지로 꼽히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만 5년에 한 번씩 개최하고 나머지 순회 코스는 순서대로 도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6년 만의 포트러시 개최는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올해 대회는 전 세계에서 27만8000명의 팬이 몰리면서 2019년 대회 최고 갤러리 수(23만7750명)를 뛰어넘었다.
영국 현지 언론과 각 기관은 ‘로열 포트러시의 기적’에 주목했다. R&A는 “올해 입장권 구매를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티켓 요청만 100만 건 이상이었다. 기록적인 속도로 입장권이 매진됐다”고 밝혔다. 포트러시는 6150명이 거주하는 북아일랜드의 작은 해안 마을이다.
셰필드할람대 스포츠산업연구센터(SIRC)는 “디오픈이 포트러시 지역에서 창출한 경제 효과는 2억1300만파운드(약 3980억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직접 경제 효과 6300만파운드(약 1177억원)와 200개국으로 송출되는 TV 중계 및 마케팅 효과 1억5000만파운드(약 2803억원) 등으로 추정했다.
포트러시에 있는 펍 ‘더퀘이스’의 총지배인은 “한 달 치 맥주를 들여왔지만, 고작 닷새 만에 맥주가 동이 났다”고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6년 전 포트러시에서 디오픈이 열렸을 때의 경제적 효과 1억파운드(1868억원)의 두 배 이상 효과를 거둔 것이다. 여기에는 지난 4월 마스터스에서 ‘커리어 그랜드슬램(4대 메이저 모두 우승)’의 위업을 이룬 북아일랜드 골프 영웅 로리 매킬로이가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당시보다 교통망이 개선되고, 숙박 시설도 크게 늘어났다. 2022년 골프의 고향으로 꼽히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150회를 기념해 성대하게 열린 디오픈에서 3억700만파운드(약 5736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거뒀던 것과도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평가다.
아일랜드 골프계, 2030년 디오픈 개최 대망론
아일랜드 골프계에서는 2030년 디오픈 개최 대망론이 확산되고 있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15km 떨어진 로열 포트마뇩 골프 클럽이 후보지로 꼽힌다. 한 아일랜드 골프 클럽 대표는 “디오픈을 주관하는 R&A와 아일랜드 골프협회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며 개최 시기는 유동적이지만 아일랜드에서 열리는 디오픈을 곧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860년 출범한 디오픈은 최초의 오픈(아마추어와 프로가 모두 참가하는) 골프 대회이자 최고(最古)의 메이저 골프 대회이다. 디오픈(THE OPEN)이란 명칭에 진정한 오픈 대회란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영국 영토를 벗어나 열린 적은 없다. 미국에서는 US오픈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 브리티시오픈이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영국의 내셔널 타이틀 대회가 아일랜드에서 열리는 것은 북아일랜드 개최를 넘어서는 상징성이 있다. 아일랜드는 1921년 독립 조약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식민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수백년간 지난한 투쟁을 벌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런 영국과 아일랜드 골프계가 힘을 모아 여는 디오픈은 진정한 오픈의 정신을 확장하는 의미를 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