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에 캐럴이 있다. 봄에는 ‘벚꽃 엔딩’ 같은 봄 캐럴이 있다. 여름은 ‘서머 팝(Summer pop)’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를 봐도 그랬다. 1970년, 서머 K-팝의 효시 격인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가 나타난 이후로 여름은 늘 가요의 격전장이었다.
기억하는가. 캠핑장에 총총히 뜬 별처럼 그해 여름을 가득 채우던 우리의 서머 팝을⋯. 듀스의 ‘여름 안에서(1994년)’,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1995년)’, UP의 ‘바다(1997년)’ 와 쿨의 ‘해변의 여인(1997년)’. 2000년대로 오면 DJ DOC의 ‘Run To You’를 필두로 쿨의 ‘애상’, 샵의 ‘Sweety’, 쥬얼리의 ‘니가 참 좋아’가 도시인의 고막에 푸른 파도를 가져다줬다. 2010년대는 어떤가. 씨스타, 티아라, 소녀시대 같은 걸그룹의 서머 팝 시대다. 2017년 레드벨벳의 ‘빨간 맛’은 남북문화교류 행사를 통해 평양에서까지 선보였다.

'불황 팝' 확산과 맞물려 더 화려해진 21세기 서머 팝
서핑 문화에서도, 경제 규모에서도 우리보다 훨씬 앞선 미국은 서머 팝의 역사가 깊다.지난 6월 별세한 브라이언 윌슨은 미국의 전설적인 밴드 비치 보이스의 리더다. ‘Surfin’ U.S.A.’ ‘Kokomo’ ‘I Get Around’ ‘Don’t Worry Baby’ ‘Surfer Girl’⋯. 수많은 히트곡으로 유명한 비치 보이스는 1960년대, 데뷔 초부터 ‘해변의 아이들’이란 그룹명에 걸맞게 캘리포니아 해변과 서핑족에게 어울리는 해맑은 노래를 양산했다.
1990년대에는 UB40가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로 레게 열풍을 일으키며 세계를 휘감았다. 한반도에까지 불어닥쳐 김건모의 ‘핑계’가 나오지 않았나. 로스 델 리오의 ‘Macarena (Bayside Boys Mix)’도 미국 입장에서는 수입된 ‘여름 대박 상품’이었다.
21세기 서머 팝은 지난 시간에 언급한 ‘불황 팝’과 맞물려 그 라인업이 더 화려하다. 기억하는가. 비욘세의 ‘Crazy in Love’, 리애나의 ‘Umbrella’, 케이티 페리의 ‘I Kissed a Girl’과 ‘California Gurls’, LMFAO의 ‘Party Rock Anthem’, 로빈 시크의 ‘Blurred Lines’ 같은 곡이 폭염과 장마를 뚫고 쏟아지던 그 많은 여름날을⋯. 근년을 봐도 루이스 폰시와 대디 양키의 ‘Despacito’, 해리 스타일스의 ‘Watermelon Sugar’, 샤부지의 ‘A Bar Song (Tipsy)’ 등이 영미권의 빨간 맛을 제대로 보여줬다.
2023년 봄 테일러 스위프트가 시작한 역대 최고 수익의 투어 ‘The Eras Tour’는 그해 여름의 색깔을 바꿔놨다. 그 푸른색은 인트로를 제외하면 사실상 매 공연의 첫 곡이었던 ‘Cruel Summer’가 칠해 놨다. 원래는 당시로서 4년이나 지난 2019년 앨범 ‘Lover’의 수록곡이다. 하지만 투어가 뜨거운 화제로 떠오르자, 늦깎이로 싱글 발매했고 발표 4년 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현상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Cruel Summer’는 이내 단순한 히트곡 제목을 넘어 하나의 캠페인 모토처럼 돼 버렸다. 쥐스탱 트뤼도 당시 캐나다 총리는 애초 스위프트의 투어 지역 목록에 캐나다가 빠져 있는 데 조바심을 내면서 자국민을 대표해 트윗을 날렸다.
스위프트에게. ‘캐나다의 많은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캐나다인이 ‘cruel summer(잔인한 여름)’를 보내지 않도록 해달라’고. 스위프트는 이에 화답하며 캐나다를 투어 종착지에 추가했다.

2024년 여름 '브랫 서머'로 만든 찰리 XCX
2024년 말 막을 내린 ‘The Eras Tour’는 세계 각지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며 스위프티(스위프트의 열성팬)의 영향력을 보여줬는데, 당시 스위프티의 새로운 루틴이 된 ‘우정 팔찌’에도 ‘Cruel Summer’가 단골 문구로 등장했다. 청량감 넘치는 사운드의 서머 팝 ‘Cruel Summer’는 악보와 멜로디를 넘어 2023년 여름을 제패한 거대 프랜차이즈 이름이기도 했다.
서머 팝이 하나의 슬로건, 문화 현상이 되는 일은 2024년에도 일어났다. 바로 영국발 ‘브랫 서머(Brat Summer)’ 신드롬이다. 지난해 6월 영국 팝 싱어송라이터 찰리 XCX가 낸 정규 6집 ‘brat’이 진원지였다. 15곡, 41분 23초 동안 숨 쉴 틈 없이 질주하는 찰리 XCX의 하이퍼팝(Hyperpop·넘치는 에너지와 맥시멀리즘 미학이 특징인 일렉트로닉 뮤직의 혼종 장르) 선물 세트는 평단과 마니아의 극찬은 물론 정치계의 주목까지 받았다. 화려하고 질주하는 음악과 대비되는 미니멀한 앨범 표지까지 화제를 넘어 문화 현상이 된 것이다. 연두색 바탕에 심심하게 ‘brat’이라 쓰인 표지. 이는 밈(meme)이 되면서 당시 미국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도 이를 패러디한 이미지를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2024년 여름을 음악과 유행에 관심 많은 이들은 브랫 서머라 부른다. 2025년에도 ‘brat’은 여름의 사운드트랙으로 재조명되고 이제는 전 세계 음악 팬 사이에 ‘brat’을 듣는 모든 여름을 브랫 서머라고 부를 기세가 엿보인다.
지구온난화로 여름이 길어진다. 여름이 혹독해진다. 올여름,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에 바나나가 열렸다. 경기 고양시에서는 커피, 구아버, 파파야 재배를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2050년에는 아열대기후 지역이 한반도의 56%까지 확대될 거란 전망도 나왔다.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상상 초월의 기나긴 여름, 우린 앞으로 또 어떤 독한 서머 팝과 함께 더위와 싸워 나갈까. 미래의 서머 팝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여름과 맞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