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이 땅의 양대 포구로 번성했던 강경. 지금은 옛 영화의 흔적은 희미하다. 그나마 꼬리뼈만큼이나 남아 있는 옛 번성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 근대역사문화거리다. 이곳에 가면 과거와 현재가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는 강경을 만날 수 있다.
충남 논산시 강경은 한때 이 땅의 내로라하는 상업도시였다. ‘물류의 집산지’로, 번성의 영광을 누렸다. ‘1평양, 2강경, 3대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강경은 금강 하구인 군산에서 뱃길로 약 37㎞ 떨어져 있다. 한겨울 얼음이 어는 30일 정도를 제외하면 수량이 일정해 배가 내륙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는데, 바람과 밀물 때가 맞으면 큰 배도 힘들이지 않고 서해에서 강경까지 단번에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강경은 조선 후기부터 수산업이 엄청나게 발달했다. 서해에서 잡은 생선, 조개가 배에 실려 강경까지 올라왔다. 소금도 있었다. 강경에서 나뉜 수산물은 금강을 타고 부여, 공주, 조치원 등으로 실려 갔다. 중국산 비단도 있었다. 강경은 원산과 함께 ‘조선의 2대 포구’로 일컬어졌다. 강경장은 평양시장, 대구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농지 수탈을 노린 일본인이 몰려들었다. 1904년 일본인이 세운 최초의 여관과 병원이 들어섰고, 1906년에는 군산~강경 간 전화가 개통됐다. 1909년 재판소가 들어섰으며 1911년에는 대형 극장까지들어섰다. 하지만 1914년 대전~강경 간 호남선 철로가 부설되면서 몰락이 시작됐다. 고속도로까지 강경의 쇠퇴를 부추겼다. 물류 중심이 인천과 부산으로 옮겨갔다. 여기에 더해 금강 하굿둑이 만들어지면서 바다와 금강을 오가는 뱃길이 완전히 끊겼고 지금은 초라하고 작은 시골로 변하고 말았다. 번성기에 상주인구 3만여 명, 유동 인구 10만여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상주인구가 1만 명에도 못 미친다.

이국적인 건물로 만나는 강경의 옛날
옛 강경의 번성했던 시절을 엿볼 수 있는 곳이 강경 근대역사문화거리다. 지금과는 양식이 많이 다른 근대 건축물이 모여 있는데,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건물을 과거 건축양식대로 다시 세운 것이다. 강경 근대역사문화거리를 대표하는 건물은 강경구락부, 옛 강경노동조합, 옛 한일은행 강경 지점, 옛 연수당 건재약방 등이다. 일제강점기에 성황을 누렸던 호텔과 백화점, 양화점, 병원 등의 건물도 재현돼 있다.
마을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은 강경성지성당이다. 동화에 나오는 것 같은 하얀색 건물이 눈길을 끈다. 1961년 지어졌다.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에밀 보드뱅 신부가 설계했는데, 배를 뒤집은 듯한 아치형으로 지어 완공 당시의 구조와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성당 뒤편에 있는 하얀색 작은 건물은 천주당이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의 금가항성당 모양을 복원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작은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오르다, 풍랑 때문에 제주도 해안에 닿는다. 28일 동안 표류한 뒤 천신만고 끝 도착한 김대건 신부는 10여 명의 동행자와 첫 미사를 봉헌한 뒤 용수리 포구에서 배 수리를 마치고 강경으로 떠났고, 강경에 도착한 그는 한 달 동안 성사를 집전하며 신자들을 돌보았다. 강경성지성당은 1961년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첫 사목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은 것이다.

옛 강경노동조합은 강경 포구의 번성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부두 노동조합 사무실이다. 조합원은 한창때 2000~3000명에 달했다. 1925년 2층으로 지어졌던 이 목조건물은 한국전쟁 때 2층이 파괴되고 지금은 1층만 남아 있다. 옛 한일은행 지점, 강경 갑문과 함께 강경의 옛 번영을 상징한다.
옛 한일은행 강경 지점은 1913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단층 건물로, 현재 강경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경이 군산보다 훨씬 번화해 한일은행 지점이 강경에 있었고, 군산에는 출장소가 있었다. 강경역사관 건물 뒤편에는 강경구락부가 있다. 구한말 근대 시절을 재현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작은 광장 주변으로 뉴트로 느낌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서 있는데, 시간을 100년 전쯤으로 되돌려 놓은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커피하우스와 호텔, 식당 등은 근사한 사진을 연출할 수 있게 한다. 강경 갑문은 하루에 100~200척의 배가 강경 포구를 드나들던 시절인 1924년 건설됐다. 갑문은 조수 간만 차에 상관없이 화물을 하역·선적하고, 강 수위 조절로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설치한 근대 시설이다. 세 곳은 모두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구 남일당한약방도 눈길을 끄는 특이한건물이다. 전통적인 한옥 구조에 상가 기능을 더했다. 묘하게 일본 건축의 분위기를 띤다. 1923년 지어졌는데, 남일당은 ‘남쪽에서 제일 크다’는 뜻이다. 건물이 있는 곳은 강경 하시장(下市場)이 섰던 곳. 주변 골목 분위기도 오랜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전한다.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개교한 지 118년 된 강경중앙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 강당은 1937년 학교 후원회가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지어 기증했다. 근대 교육 시설 중 강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근대역사문화거리 바로 옆이 젓갈거리다. 지금의 강경은 젓갈 하나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부터 발달한 염장법이 토대가 됐는데, 젓갈 생산과 유통에서 강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60~70%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6)가 펴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강경포 어선은 청어와 조기를 많이 잡았고 소금이 많이 생산돼 다른 지방과 교역하였는데, 상품으로는 어염(魚鹽)을 많이 거래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어염’은 소금에 절인 생선 즉, 젓갈을 말한다.
여행수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