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검푸른 수면 아래서 조용히 다가온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잊혔지만 사라지지 않은 어둠, 현실에 잠복한 불안이다. 불편한 진실, 외면했던 거짓 그리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그렇게 공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바다보다 깊은 마음에서 솟구쳐 오른다.
경찰서장 마틴은 부임 후 첫 여름을 맞는다. 아미티는 여름 한철 장사로 1년을 먹고사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아이들이 울타리를 부쉈다는 신고가 그날 벌어진 가장 큰 사건일 정도로 마을은 평화롭다. 그런데 해수욕장 개장을 앞둔 어느 날, 상어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발견된다.
마틴은 지체하지 않고 해안을 폐쇄하고 수영을 금지하려 한다. 그러나 시장과 시의원 그리고 마을 주민은 그의 결정을 반대한다. 상어 이빨에 뜯겨나간 시신의 상태를 직접 확인했던 검시관조차 시장의 회유를 받은 것인지, 모터보트 프로펠러에 의한 사고사라고 말을 바꾼다.
“상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우리는 여름 장사를 완전히 망치게 될 거요.”
그들은 안전보다 이익을 택한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함,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생계, 마을 전체의 경제적 소득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과 정치적 계산이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고, 자연의 위험 경고를 묵살한다. 해변을 폐쇄하고 1년 치 벌이를 날리는 것이 그들에겐 상어에게 물려 죽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면서도 일어날 확률이 높은 재앙이었다. 100만분의 1로 희석한 피 냄새를 맡을 정도로 발달한 후각과 1㎞ 넘게 떨어진 곳에서도 미세한 소리를 감지하는 뛰어난 청각으로 먹잇감을 찾아내는 상어라지만,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무엇에도 양보하지 않고 물러설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이다. 결국 해변은 수많은 피서객으로 가득 찬다. 시장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만, 마틴의 마음에는 불안의 검은 그림자가 떠나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종종 무력하다. 따라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비극의 원인을 자연, 즉 상어에게 돌릴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사고가 두 번, 세 번 거듭되고 희생자가 반복해서 나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연재해가 아니다. 위험을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대비하지 않고, 경고를 무시하며 상황을 방치한 인간의 잘못 즉, 인재(人災)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당신은 사람들이 수영하게 뒀어요. 그 결과 내 아이가 죽었어요.”
마틴의 두려움은 현실이 된다. 상어는 다시 출몰했고 피해자의 가족은 경찰서장 마틴을 원망한다. 시장의 강압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자신에겐 책임이 없는 것일까, 마틴은 마음이 무겁다. 그는 다시 시장을 설득한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시장은 상어를 잡는 사람에게 거액의 포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자주 두려움을 능가한다.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공포는 모험심을 견인하는 가장 효과적인 미끼가 된다. 스릴을 즐기려는 관광객과 소문을 듣고 찾아온 현상금 사냥꾼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상어 사냥 축제가 되어버린 아미티는 역설적으로 호황을 누린다. 동시에 희생자 또한 늘어간다.
상어 전문 학자 후퍼와 전문 사냥꾼 퀸트가 식인 상어를 포획하기 위한 작전에 합류한다. 바다도 수영도 싫어했지만 내 마을,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무장한 마틴은 그들과 함께 바다로 나간다. 그러나 상어가 금방 눈앞에 나타나 줄 리 없고 쉽게 잡혀줄 리도 없다. 더구나 상어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망망대해를 헤매는 작은 배는 세상의 또 다른 축소판이다. 경험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퀸트와 지식과 이성을 중시하는 후퍼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정작 상어가 나타났을 때도 독선적인 퀸트는 협력을 거부한다. 과연 세 사람은 지혜와 힘을 모아 상어를 이길 수 있을까.
그들이 잡으려는 상어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 인간 탐욕이 불러올 수 있는 엄청난 결과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영화는 푸른 바다의 낭만 뒤에 숨겨진 미지의 위협,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하고 오만할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섬뜩하게 경고한다.
1975년 개봉한 ‘죠스’는 블록버스터라는 말을 탄생시키며 서스펜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상어는 영화가 시작되고 80분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 관객은 파도 너머에서 ‘둥-둥’ 하고 들려오는 불길한 테마 음악을 들으며 마음 깊이 잠들어 있던 두려움에서 깨어난다.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마주치는 희생자의 비명은 상상력을 더 크게 자극하고 공포를 극대화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주는 심리적 압박은 그 어떤 시각적 효과보다 강력하게 관객을 사로잡는다.
아미티의 시장은 안전보다 이익을 택했고, 마을 주민은 생계를 이유로 그 결정을 지지했다. 그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은 안타까운 사고를 방치한 또 다른 공범이다. 그러나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은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결과만을 마음에 단단히 새겼고, 과장된 공포심은 멸종 위기를 맞이할 정도로 상어가 무분별하게 포획되는 당혹스러운 현실로 이어졌다. 영화가 던진 진정한 경고는 외면당한 채, 막연한 공포가 또 다른 왜곡과 더 큰 재난을 불러온 것이다.
‘죠스’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던 세계가 실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무엇에 눈 감고 살아가는가, 묻는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괴물인가, 죽음인가, 아니면 진실인가? 또는 발밑에 묻어두었지만 언제든 입을 벌리고 우리를 삼킬지 모를 어둠일까?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깐 깊은 곳 어딘가로 숨어든 것일 뿐, 지금은 물리친 것 같지만 인간의 욕망이 잠들지 않는 한,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상어’는 반드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