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스페인에서 5만 명의 관중이 대한항공을 향해 환호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8월 9일(이하 현지시각)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블랙핑크 콘서트에서 공연 시작 직전 상영된 대한항공 광고 덕분이었다. 모든 기업이 꿈꾸는 수준의 홍보였다.
스페인에서 대형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한국 아이돌은 블랙핑크만이 아니다. 지난 7월 스트레이 키즈는 마드리드 축구경기장에서 전석을 매진시켰고, 에스파와 에이티즈도 각각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대형 아레나를 가득 채웠다. 올해에만 15팀 이상의 한국 음악 공연이 스페인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이들이 한류(韓流) 확산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도 상당히 인기다. 많은 나라에서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를 차지했고, 수록곡 역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대표 수록곡 ‘골든’은 8월 1일 영국 메인 싱글 차트 ‘오피셜 차트’ 톱100 1위, 8월 11일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 1위를 기록했다. K-팝을 잘 몰랐던 이들조차 이 영화를 계기로 K-팝을 듣기 시작했다.

K-팝 인기에 한국 찾는 관광객·유학생 늘어
2010년 한국을 찾은 스페인 관광객은 1만2590명이었다. 지난해에는 4만7031명으로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으로 관광 수요가 타격을 입었음에도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임수석 주스페인 한국 대사는 “한류는 유럽의 한국 관광 수요 증가 요인 중 하나로, 특히 젊은 층이 한국에 가고 싶어 하도록 한다”며 “예를 들어 유럽연합(EU)의 ‘에라스뮈스 플러스(Erasmus+)’ 교환학생 프로그램에서 한국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라고 설명했다. 에라스뮈스 플러스는 EU가 주도하는 교육 사업으로, 학생의 해외 이동성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최근 발표된 ‘2026 QS 세계 학생 도시 순위’에선 서울이 세계 최고의 유학생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울이 전 세계적 매력을 갖춘 도시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인데, K-팝과 한류를 그 성공의 핵심 동력으로 본다. 한류를 계기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도 ‘케데헌’의 인기로 외국인 방문객과 매출이 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 현지에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배우려는 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6월 스페인 한국문화원이 주최한 ‘제13회 K-팝 콘테스트’ 보컬·랩 부문 우승자인 아우레아 아다메는 “K-팝 덕분에 한국 문화와 음식 등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한국 방문을 희망한다. 한류에서 출발해 한국의 전통문화로 관심을 넓힌 전형적인 흐름이다.
통계로도 확인된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첫해인 2011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의 대(對)스페인 수출은 82% 증가했다. 자동차, 휴대전화, 스킨케어 제품 등 한국 제품의 품질이 주된 경쟁력이지만, 상당수는 영화·드라마·팝스타의 홍보나 간접 광고를 통해 인지도와 인기를 높였다. 이러한 ‘승수효과’는 유럽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JY엔터테인먼트 홍보팀 관계자도 “브랜드와 협업은 필수적인 마케팅 전략”이라며 “아티스트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가치가 브랜드와 진정으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음악에서 식품·뷰티까지… 커지는 K-팝 경제 파급효과
한류가 한국 경제에 주는 이익을 두고 ‘이 흐름이 지속 가능한지, 아니면 이미 절정기에 도달해 향후 타격받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피크 한류(Peak Hallyu·한류 정점론)’ 논쟁이 수년간 주기적으로 반복돼 왔다는 사실이 그 해답을 말해준다. 한류의 성공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인 흐름이라는 것이다.
한류가 이미 주류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실감한 건 몇 년 전이었다. 마드리드 외곽 한 대학에서 한국 현대사 강연을 마친 뒤 탄 택시 안이었다. 스페인 라디오는 대체로 스페인어 노래만 틀고, 가끔 영어 곡을 내보낸다. 그런데 갑자기 방탄소년단(BTS)의 히트곡이 흘러나왔고, 택시 기사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스페인 라디오가 K-팝을 틀 만큼, 청취자가 적어도 멜로디는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는 방증이었다.
이 강연과 택시 경험은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직전이었다. 팬데믹은 K-드라마와 한국 문화 전반이 전 세계적으로 더 널리 알려지고 주류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사람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온라인 스트리밍 콘텐츠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오징어 게임’의 기록적 시청률,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을 문화 강국으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는 파생 산업에도 막대한 이익을 안겼다. 유럽 어느 도시를 가도 한국 식당을 찾을 수 있다. 분식, 치맥(치킨과 맥주)처럼 특정 메뉴에 특화된 식당부터 한국 식품을 파는 슈퍼마켓, 아시아 식품점까지 다양하다. 각국 식당은 한국 재료와 메뉴를 도입하고, 대형 슈퍼마켓 체인도 한국 식품을 판매한다.
세계 최고 셰프로 3년 연속 선정된 스페인 셰프 다비즈 무뇨스는 김치를 메인 요리와 디저트에 적극 활용한다. 필자가 재직 중인 영국 킹스칼리지 런던도 학생 수요에 맞춰 김치와 한국식 치킨 랩 등 한국 간식을 판매한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4년 K-푸드 수출액은 130억달러(약 18조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마찬가지로 유럽 도시 곳곳에 K-뷰티 전문점과 한국 화장품을 취급하는 매장, 뷰티 체인도 자리 잡았다. 지난해 필자가 마드리드의 고(故) 조부모님 집 근처 거리를 걷던 중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음식점과 전통 바, 유럽·중남미 식료품점이 줄지어 있는 거리 한가운데 한국 화장품 매장이 생긴 것이다. 점원은 “모든 연령층 고객이 주로 한국 TV 프로그램과 온라인 검색을 통해 제품과 뷰티 루틴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발표한 2024년 K-뷰티 수출액이 102억달러(약 14조1950억원)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스페인 블랙핑크 콘서트 현장에서 필자와 만난 다니엘라와 알레한드로의 이야기는 한류가 이미 주류로 자리 잡았고, 앞으로도 이어질 흐름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블랙핑크 노래를 들으며 멜로디, 목소리, 안무 완성도를 즐기기 시작했고, 지금은 에스파와 베이비몬스터까지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한국을 ‘쿨한 나라’로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필자가 처음 한국을 찾은 것은 2003년 유학 때였다. 당시 가장 자주 들은 질문은 ‘왜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을 선택했느냐’였다. 한국 대학에서 만난 학생조차 같은 질문을 던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블랙핑크의 옛 히트곡과 최신곡을 2시간 넘게 즐기며 노래하는 5만 명의 스페인 사람을 보며 드는 생각은 단순하다. ‘왜 한국이 아니겠는가?’ 이 한마디가 주류로 자리 잡은 한류의 성공이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이익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