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과 달리 한국은 1950년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농지개혁으로 사회적 이동성이 확대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 발전에 집착한 덕분에 고성장이 이뤄졌다. 민주화 이후에는 포용적 제도의 힘이 발휘됐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8월 19일 ‘경제학자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경제학자대회(ESWC) 2025’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ESWC는 세계계량경제학회가 5년에 한 번씩 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학 학술대회로, 8월 18~22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렸다. 아시아에서는 1995년 일본 도쿄, 2010년 중국 상하이에 이어 세 번째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10년 만에 대면 방식으로 열렸다.
로빈슨 교수는 대런 아세모글루, 사이먼 존슨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MIT) 교수와 함께 사회적 제도가 국가 번영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수상자들은 법치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제도를 구축한 사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연구했다. 특히 로빈슨 교수는 아세모글루 교수와 함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를 집필하기도 했다.
책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차이가 포용적인 정치·경제 제도 유무에 의해 갈렸다고 분석했다. 로빈슨 교수는 “(한국을 보면)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정치체제가 경제적으로는 포용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중국도 그 한 사례일 수 있다”고 했다. 다음은 로빈슨 교수와 네이선 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경제학 교수의 일문일답.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유로 ‘제도’의 원인과 결과를 밝혀낸 연구가 꼽힌다. 이 연구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됐고, 아직 알지 못한 부분은 무엇인가.
“우리 연구는 사실 사람들이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다시 환기한 부분이 크다. 예를 들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는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의 개념을 강조했는데, 이는 이미 역사 속 사례에서 확인되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체계화하고 실증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질문이 많다. 예를 들어, 특정한 제도적 균형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 또 그것이 문화나 사상·사회적 가치와 어떻게 맞물리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경제학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 접근을 해왔고, 우리 연구 역시 문화의 중요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북한과 달리 한국은 포용적인 제도 도입으로 성공했다고 봤는데.
“북한은 착취적인 제도의 전형인 국가고, 남한은 비교적 포용적인 제도를 도입한 국가다. 한국은 1950년대 일본인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재분배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농지개혁으로 사회적 이동성이 확대됐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 시기에는 독재 체제하에서 경제성장이 이뤄진 것이라지만, 결과적으로 산업화를 촉진했다. 다만 이는 제도적 필연이라기보다는 지도자의 성향에 의존한 ‘운’ 의 요소가 컸다. 한국은 운이 좋은 나라다. 이후 민주화를 통해 더욱 포용적인 제도의 형태로 변했고 그 결과 경제가 빨리 성장했다.”
로빈슨 교수는 대담에서 “한국의 초기 성장이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이뤄졌다는 점은 흥미롭다”며 “한국 경제의 고성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 발전에 집착한 덕분에 이뤄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당 체제나 권위주의 체제도 포용적일 수 있는가.
“경제적인 면만 봤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를 보자. 1970년대 말 이후 성장 가속화를 보면,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경제 제도가 훨씬 포용적으로 변화했다. 가격 통제 폐지, 집단농장 해체, 가구 단위 책임제 도입 등으로 사람들이 자기 노력의 성과를 직접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교과서적인 포용적 경제 제도의 사례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이론에서 포용적 경제 제도는 결국 포용적 정치 제도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
로빈슨 교수는 대담에서 현대그룹을 예로 들며 “한국에만 존재하는 ‘재벌’ 구조는 한국 사회의 문화, 국가 운영 방식, 가족 중심적 가치가 맞물려 형성된 고유한 성공 경로였다” 고 평가했다.
그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거의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놀라운 사회적 상승을 이뤘다. 이와 같은 예시가 포용적 제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로빈슨 교수는 한국이 독재 체제하에 일관성 있는 경제 발전을 거쳐 민주화 시대 포용성 있는 제도하에 경제성장을 끌어낸, 경제학 이론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사례라고도 덧붙였다.
서양의 경험을 보편적 발전 모델로 삼은 것이 현재 개발경제학이라고 보나.
“내가 대학원생일 때 약 4만5000개의 아프리카 부족이 통합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상황을 권력 분산에 따른 실패로 보았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회는 원하는 공동체 가치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나라가 서양에서 주장하는 ‘정상 경로’에 도달할 필요는 없다. 서양식 사고방식이 늘 옳다고 보긴 어렵다.”
로빈슨 교수는 대담에서 미래에 유망한 나라로 나이지리아를 꼽았다.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 나이지리아는 연 10%씩 성장할 잠재력을 갖췄다고 본다. (지금의 인구 증가 속도라면) 나이지리아가 2050년쯤 세계 3대 인구 대국이 되고 2100년 정도엔 인구의 40%가 아프리카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경제학도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멘토랍시고 조언하는 말은 흘려들어라’라고 하고 싶지만, 연구할 때 겸손함이 가장 중요하다. 세심하고 꾸준한 연구가 이어질 때 작은 변화가 모여 세상이 나아질 것으로 믿는다.”
“현금 지원, 노동 공급 축소 부작용”
세계경제학자대회 셋째 날인, 8월 20일 ‘사회 안전망 정책: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 얻은 교훈’ 세션에서는 정부의 현금 지원 정책이 노동 공급 축소 같은 부작용을 야기했다는 연구 결과가 공개됐다.
패트릭 크라우스 오픈리서치 연구원은 미국 내 기본 소득 실험 결과를 소개하며 “현금 지원이 노동 공급을 줄이는 경향이 있지만, 근로 질이나 삶의 질 개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연구진은 미국의 두 개 주에서 저소득층 1000명에게 매달 1000달러를 3년간 지급하고, 2000명의 대조군에 매달 50달러를 지급했다. 그 결과 저소득층의 총소득은 대조군 대비 연간 2000달러 줄었고, 노동시장 참여율은 3.9%포인트 낮아졌다. 이들의 주당 근로시간은 1~2시간씩 줄었다. 배우자의 근로시간 역시 비슷하게 줄었다.
이정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서울 디딤돌 소득’ 시범 사업의 효과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사업은 중위 소득 85% 이하(재산 3억2600만원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기준 소득 대비 부족한 가계소득의 절반을 채워주는 사업이다.
연구진은 2022년부터 2025년까지 디딤돌 소득 지원을 받는 5000가구 이상을 설문 조사한 결과, 소비지출은 늘었지만 노동 공급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 실험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 노동은 8%, 자본은 15% 줄고 총산출도 14% 줄어든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