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버린 AI(Sovereign AI·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AI)에 대한 여러 선택지가 있지만, 분명한 건 국내 경쟁이 아니라 글로벌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세계시장에서 이길 수 있는 소버린 AI를 우리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8월 18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개막한 SK그룹 지식 경영 플랫폼 ‘이천포럼 2025’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각국은 주권 확보와 안보 차원에서 소버린 AI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소버린 AI는 개별 국가 차원에서 개발하는 독자 AI 모델로, 외국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자국 언어·문화·사회에 대한 이해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6월 4일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AI 3대 강국’ 실현을 국정 과제로 내세우고, 소버린 AI 구축을 위해 국내 기업 대상으로 ‘국가대표 AI 선발전’을 펼치고 있다. 최근 5개 정예팀(네이버클라우드, 업스테이지, NC AI, LG AI연구원 등)을 추렸고, 여기에 SK텔레콤이 포함됐다.
앞서 지난 6월 SK그룹은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함께 7조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 규모 AI 데이터센터를 울산에 짓기로 했다. 이 데이터센터는 약 6만 장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수용하는 거대 AI 인프라로, 업계는 글로벌 AI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가 운영하는 초대형 데이터센터와 견줄 만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SK의 투자는 최 회장이 강조한 ‘글로벌 전쟁으로서의 소버린 AI’를 뒷받침할 구체적 실행 카드로 해석된다.
이천포럼은 2017년 최 회장의 제안으로 시작됐으며, 6월 경영전략회의, 10월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와 함께 SK그룹의 3대 행사로 꼽힌다. 올해는 8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간 ‘AI와 디지털 전환(DT)’을 핵심 의제로 진행됐다. 첫날 행사에는 최 회장과 최재원 수석 부회장, 최창원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 의장을 비롯해 그룹 계열사 주요 경영진, 학계 전문가 등 약 250명이 참석했다.
트럼프發 질서 재편, 리스크 관리 강화
올해 이천포럼은 AI 외에도 급변하는 국제 질서 등 불확실한 경영 환경 속에서 SK그룹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를 위한 SKMS(SK Management System) 실천 방안 등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뤄졌다. 이를 위해 마련된 포럼 첫 세션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 재편, 한국 기업의 해법 모색’에 참석한 최 회장은 “트럼프의 정책이 전략적(strategic)으로 예측 가능(predictable)하지만, 전술적(tacti-cal)으로는 예측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라고 했다.
해당 세션에는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C) 한국 석좌와 징첸(Jing Qian)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책연구소 중국분석센터 소장이 온라인으로 기조연설을 했고, 윤치원 SK㈜ 사외이사, 김현욱 세종연구소장, 박성중 신한투자증권 투자전략부 총괄이 패널로 참여해 한국의 통상·외교정책 방향과 기업의 대응 전략을 논의했다.
최 회장은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후 미국 우선주의라는 큰 전략은 일관되지만, 관세와 보조금, 규제 같은 세부 전술은 돌발적으로 움직인다고 봤다. 이에 한국 기업이 중장기 전략을 세울 순 있어도, 실행 단계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맞을 수도 있다고 했다. 최 회장은 SK그룹 차원에서 글로벌 밸류체인(가치 사슬) 전반의 정치·통상 리스크 관리 체계 강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짚기도 했다.
AI에 잘 적응하는 者만 생존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이날 개회사에서 유전학자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을 인용하며 “그(다윈)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적자생존에) 틀림없이 ‘AI’라는 단어를 덧붙였을 것”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았다면, 이제는 ‘AI에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을 수 있다(survival of the AI fittest)’는 것이다.
곽 사장은 “2007년 애플 아이폰, 2016년 클라우드 컴퓨팅이 일으킨 혁신보다 AI가 몰고 올 변화가 훨씬 파괴적이고 강력할 것”이라며 “메모리 반도체도 범용에서 맞춤형으로 바뀌는 흐름 속에, 시장 예측, 공정 효율성, 사업 성패가 모두 AI에 의해 좌우된다”고 했다.
SK하이닉스는 AI 시대 필수 메모리(D램)로 불리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에서 1위다. HBM을 통해 SK하이닉스는 2025년 1분기 33년간 D램 시장 1위였던 삼성전자를 밀어내고 글로벌 D램 시장 1위에도 등극했다. SK하이닉스의 2025년 2분기 영업이익은 9조2129억원으로, D램 출하량에서 HBM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대지만, 영업이익 비중은 절반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곽 사장은 “세계 최초 HBM 개발은 SK와 손잡은 이듬해(2013년) 이뤄낸 성과로, SK가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과감히 미래 투자를 지속했기에 오늘의 신화가 가능했다”고 했다.
최 회장은 2012년 경영난에 시달리던 하이닉스를 채권단으로부터 인수해, 개명하고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최 회장은 회사 인수에 이어 적극적인 자금 투입으로 채권단 체제에서 여의치 않았던 대규모 장비와 설비를 갖추게 하고, 미래 기술에 대한 투자를 지속했다.
‘아픈 손가락’ 배터리 사업, 경쟁력 강화 고심
배터리는 반도체를 이을 SK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꼽힌다. 그러나 전기차 캐즘(cha-sm⋅혁신 제품이 대중화하기 전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는 것)으로 업황이 둔화하며 그룹 재무 전반에 부담을 주고 있다. 배터리 사업을 맡고 있는 SK온은 2024년 1조원대 적자를 낸 데 이어 2025년 상반기에도 3658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그럼에도 SK그룹은 배터리 사업에서도 SK하이닉스 사례처럼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사업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7월 30일 SK이노베이션이 발표한 배터리 자회사 SK온과 윤활기유 자회사 SK엔무브의 합병안도 이 같은 맥락이다. 이석희 SK온 사장은 이날 행사에서 “합병 후 SK엔무브는 사내독립기업(CIC) 형태로 운영된다. 전담 태스크포스(TF)가 가동되고 있다”고 했다.
SK온은 11월 1일 SK엔무브를 흡수합병한다. 이 사장은 합병에 따른 SK온의 실적 개선에 대해 “회사 실적보다 사업 영역인 배터리 턴어라운드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 본원적 경쟁력 강화가 더 중요하다”라며 “(배터리 사업 흑자 전환과 관련해) 하반기 불확실성이 있지만, 시장 상황에 유연하게 잘 대처해나가고, 추진 중인 운영 효율화(OI)가 얼마나 잘 진행되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출장비도 없던 SK하이닉스 D램
1위 오른 비결은 ‘원팀’

“회사가 문 닫기 직전까지 갔던 경험에서 집요함과 치열함을 배웠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8월 18일 SK그룹 이천포럼 2025에서 이같이 말했다. SK하이닉스의 전신 하이닉스는 2000년대 말 메모리 반도체 업계를 휩쓴 D램 가격 경쟁으로 생존 위기에 몰렸다.
곽 사장에 따르면, 당시 하이닉스는 냅킨 한 장을 아끼려고 전 사원이 손수건 가지고 다니기 운동을 했고, 출장비가 없어 개인 마일리지로 출장을 다녀오라고 직원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모든 구성원이 강제 무급 휴가를 갔으며, 수석급 이상은 월급 10%를 반납했다. 하이닉스는 2012년 SK에 인수됐다.
곽 사장은 “SK를 만난 후 이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장비와 설비를 갖추고,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내놨다”라며 “2세대 때는 경쟁사가 앞섰지만, 우리 잘못을 고민한 뒤 여러 기술적 시도를 했다”고 했다. 이어 “발열이 문제라고 하니, 누군가 열을 빼기 위해 금속 기둥을 추가로 박자는 생각을 했고, 누구는 기둥을 추가하면 더 강하게 압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압착이 강해지니 힘이 깨지는 현상이 발견됐다”라며 “‘원팀’ 정신이 없었다면 HBM 신화는 불가능했을 것” 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는 ‘만년 2위’를 벗어나 AI 메모리 반도체 3년 연속 1위, 글로벌 D램 시장 1위, 시가총액 200조원 돌파, 세계 최초 321단 낸드 양산, 세계 최초 12단 HBM4(6세대) 샘플 공급, 대학생이 일하고 싶은 기업 1위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 곽 사장은 “최근 변화의 중심에는 AI가 불러온 산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파괴적 혁신이 있다”라며 “변화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오고 있지만, 우리는 결국 그것을 헤쳐나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