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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입맛은 어느새 가을로 기운다. 전어, 대하, 송이, 밤 등 먹거리가 풍성해지는 이 계절은 그야말로 오감이 즐거운 미식의 대향연장이다. 이토록 다채로운 가을 별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을 꼽으라면 단연 슈냉 블랑(Chenin Blanc)이다. 산뜻한 화이트 와인부터 청량한 스파클링, 감미로운 드미-섹(Demi-Sec)과 농밀한 스위트 와인까지. 한 품종이 선보이는 폭넓은 스펙트럼은 가을 식탁의 모든 음식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그렇다면 산지에 따라 슈냉 블랑은 어떤 매력을 선보이며 9월 제철 음식과는 어떤 궁합을 자랑할까.

루아르강이 빚은 프랑스의 슈냉 블랑

슈냉 블랑의 고향은 프랑스의 루아르(Loire) 지방이다. 원래 플랭 당주(Plant d’Anjou)라고 불렸지만, 중세 시대 한 수도원이 루아르강 인근의 ‘몽 슈냉(Mont Chenin)’ 언덕에서 이 포도를 재배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병충해에 강하고 숙성 잠재력까지 갖춘 이 포도는 이후 여러 마을로 퍼져 나가 부브레(Vouvray), 사브니에르(Saven-nières), 코토 뒤 레이옹(Coteaux du Layon) 같은 명산지의 기반이 됐다.

루아르강 중류의 동쪽에 있는 부브레는 슈냉 블랑의 모든 스타일을 아우르는 곳이다. 

기후가 서늘하며 점토와 부싯돌이 섞인 석회질 토양이어서 날씨에 따라 수확되는 포도의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년보다 기온이 낮은 해에는 상큼한 스파클링과 섬세한 화이트 와인이, 온화한 해에는 붉은 사과, 복숭아, 살구 등 농익은 과일 향이 가득한 중간 당도의 드미-섹과 꿀, 밀랍, 견과, 마른 과일 등의 진한 풍미를 뽐내는 스위트 와인이 생산된다. 

부브레의 다양한 타입을 맘껏 즐기고 싶다면, 가을 별미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 전어구이를 추천한다. 드라이 화이트나 스파클링의 경쾌한 산미는 레몬을 뿌린 듯 전어의 기름기를 잡아주고, 드미-섹의 은은한 단맛은 전어의 고소함을 한층 살려준다.

루아르강 중류의 서쪽에 있는 사브니에르는 프리미엄 슈냉 블랑의 성지다. 부브레보다 기후가 온화하고 화강암이 섞인 석회암지대인 이곳은 탄탄한 구조감과 미네랄리티가 돋보이는 와인을 생산한다. 대부분 단맛이 없는 드라이 화이트 스타일로 출시되는데, 사과, 레몬, 복숭아 등 신선한 과일 향에 약간의 허브와 훈연 향이 어우러져 아로마가 상당히 고급스럽다. 숙성 잠재력도 좋아서 셀러에 오래 보관했다가 마시면 와인에 꿀과 견과 향이 더해져 맛이 더욱 풍부해진다. 사브니에르의 깊은 풍미는 버섯과 궁합이 잘 맞는다. 송이구이와 즐기면 버섯 특유의 향긋함이 와인의 허브 향과 조화를 이루고, 버섯전골의 감칠맛은 와인의 풍성한 복합미와 제법 잘 어울린다.

루아르강 지류인 레이옹강을 따라 펼쳐진 코토 뒤 레이옹은 스위트 와인 산지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한다. 온화한 기후와 남향의 완만한 언덕 지형 때문에 이곳은 가을이면 늘 귀부균이 슈냉 블랑에 번식하는데, 이 곰팡이에 감염되면 포도가 서서히 마르면서 당도와 풍미가 극대화된다. 

이런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질감이 매끈하고 꿀, 살구, 복숭아, 감귤류 등 달콤한 아로마가 충만한 스위트 와인이 탄생한다. 단맛이 진하지만 높은 산미가 균형을 이뤄 와인이 경쾌하고 꿀 향의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코토 뒤 레이옹과 함께 즐길 가을 별미로는 단호박이나 밤이 제격이다. 단호박찜에 곁들이면 음식의 부드러움과 와인의 달콤함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군밤이나 찐밤의 고소함은 와인의 꿀 향과 만나 맛있는 앙상블을 이룬다.

아프리카의 태양이 기른 남아공의 슈냉 블랑

슈냉 블랑의 최대 생산국은 이제 프랑스가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이다. 17세기 말 종교 박해를 피해 지금의 남아공으로 이주한 위그노(개신교도)가 프랑스에서 여러 가지 포도를 들여왔는데, 그중 슈냉 블랑이 주목을 끈 것이다. 생명력이 강인하고 더운 날씨에 재배해도 높은 산미가 유지되며 안정적인 품질을 보여주자, 이 품종은 스틴(Steen)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남아공 대표 품종으로 자리 잡았다.

남아공은 서늘한 해안 지역부터 뜨겁고 건조한 내륙까지 와인 산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어 슈냉 블랑의 스타일도 천차만별이다. 가격대가 합리적인 데일리급은 대부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해 보디감이 가볍고 과일 향이 신선하며 뒷맛이 깔끔하다. 이런 와인은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맞지만, 가을에 제철을 맞는 고등어를 구워 안주 삼아 마시면, 생선의 기름진 맛을 와인의 상큼함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음식의 짭짤함이와인의 과일 향을 살려준다. 데일리급 중에는 슈냉 블랑 고유의 복숭아와 살구 향을 강조한 와인도 있다. 여기에는 달콤한 가을배추에 돼지고기를 얹어 쌈장을 더해 즐기면 배추와 쌈장의 단맛과 와인의 과일 향이 서로 어울려 훌륭한 맛의 궁합을 선사한다.

프리미엄급 슈냉 블랑은 주로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다. 특히 스텔렌보스(Stel-lenbosch)와 스와틀랜드(Swartland) 지역은 100년 이상 된 고목이 지금도 살아 있어, 복합미가 탁월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오크 배럴에서 숙성한 프리미엄급은 질감이 크림처럼 부드럽고 사과, 복숭아, 건살구등 농익은 과일 향에 꿀, 아몬드, 바닐라 같은 아로마가 어우러져 맛이 한결 입체적이다. 이런 와인은 9월이면 살이 오르고 단맛이 진해지는 대하를 버터에 구워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다. 

새우의 감칠맛과 버터의 고소함이 와인의 다채로운 풍미와 맛의 조합을 이루고, 와인의 향신료와 견과 향이 음식 맛을 세련되게 끌어올린다. 우아하고 섬세한 루아르, 힘차고 풍부한 남아공. 산지별로 스타일은 달라도 슈냉 블랑의 넘치는 생동감은 가을 식탁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