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심곡 바다부채길. /최갑수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 /최갑수

입추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바람 온도가 바뀌었다. 팔꿈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한결 시원하다. 피서철이 지나고 사람으로 북적이던 바닷가도 조금은 한적해졌다. 지금, 바다를 즐기기 가장 좋을 때다.

이번 주는 강릉으로 간다. 경포대와 정동진, 오죽헌 말고 조금은 다른 코스. 커피도 마시고 미술관에도 간다. 파도가 치는 해변 트레킹 코스도 걸어보자.

안목해변 카페 거리. /최갑수
안목해변 카페 거리. /최갑수

한국의 시애틀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

먼저 커피. 많은 이가 커피 하면 강릉을 떠올리지 않을까. 테라로사며 보헤미안 등 전국적으로 이름난 카페가 강릉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강릉이 이처럼 커피로 유명해지게 된 건 박이추 선생 덕이 크다. 박 선생은 다크 로스팅과 핸드드립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서울 성북구 고려대 후문 쪽에서 커피점을 운영하다 2000년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왔다. 처음엔 경포대에 보헤미안을 열었지만, 관광지의 번잡함이 싫어 2004년 연곡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도 연곡에 보헤미안 본점이 있다. 강릉 시내를 벗어나 속초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면 만나는데, 야트막한 언덕에 하얀색 건물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 당시 보헤미안과 테라로사보다 커피로 더 유명했던 곳이 안목해변이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횟집 앞에 어마어마한 수의 자판기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판기마다 커피와 설탕과 ‘프림’을 다른 배합으로 만들어냈는데, 그래서 안목해변에 자주 드나드는 이들은 저마다 ‘단골 자판기’가 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횟집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지금은 카페 거리가 됐다. 하나둘 커피 전문점이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바다를 마주 보는 건물 대부분이 커피 전문점이다. 커피콩을 직접 볶아 만든 커피를 선보이는 곳도 있고 요일마다 다른 품종 커피를 내놓는 곳도 있다. 커피 전문점이 늘어나면서 커피 자판기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 20여 일간을 강릉에서 보냈다. 바다가 보이는 오피스텔을 빌려 살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돼 그 열망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하슬라 아트월드. /최갑수
하슬라 아트월드. /최갑수

강릉에서 생활은 단조로웠다. 오전 3시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썼다.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여기는 바닷가니까. 바다는 생각하는 인간을 싫어하고 일하는 인간을 더 싫어하니까.

숙소 가까이에 ‘카페 브라질’이라는 근사한 카페가 있었다. 박 선생의 수제자가 운영하는 카페라고 했다. 그 카페에는 다소 ‘옛날스러운 블랙퍼스트 메뉴’가 있었다. 예가체프, 케냐AA, 과테말라 등으로 매일매일 바뀌는 ‘오늘의 커피’와 주인이 직접 만든 식빵 한 조각, 딸기잼, 삶은 달걀, 요구르트와 시리얼이 함께 나왔다. 나는 2층의 통유리 앞 테이블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며 아침을 먹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였나, 바닷가에 살고 있는 어느 등장인물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매일 바다를 보지만 똑같은 파도는 하나도 없어.” 3주 동안 강릉에서 살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음을 열어주는 바다 드라이브

심심할 때면 차를 몰고 드라이브를 나서곤 했다. 제일 좋아하는 코스는 헌화로였고, 그 길을 따라가면 정동 심곡 ‘바다부채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그 길을 국내에 있는 바다 트레킹 코스 중에서는 단연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걷는 내내 푸른 바다를 옆에 두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청명한 파도 소리에 귀를 씻고 바다 위 불쑥 솟은 기암괴석을 감상하는 일도 즐겁다.

길이는 길지 않다. 정동진 썬크루즈 리조트 주차장에서 심곡항 사이 2.86㎞로,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매표소를 지나 급한 내리막길을 내려가 탐방로에 들어서자마자 티끌 하나 없는 푸른 수평선이 펼쳐지고 시원한 파도 소리가 쉴 새 없이 귓전으로 밀려든다. 탐방로는 경사가 거의 없어 남녀노소 누구나 어렵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길은 해안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며 나아간다. 발 아래로 금방이라도 발목을 잡을 듯 파도가 꿈틀댄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히면 솟구치는 흰 포말이 어깨를 적실 정도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즐거움도 크지만,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놓인 기암괴석을 감상하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다. 걷다 보면 자연스레 투구바위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바다부채길 최고의 절경이다. 이름 그대로 장군이 투구를 쓰고 있는 것만 같다. 우뚝 솟은 투구바위 주위로는 크고 작은 바위가 즐비하게 널려 있다. 세찬 바람에 시달린 탓에 하나같이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카페 브라질’의 핸드드립 커피. /최갑수
‘카페 브라질’의 핸드드립 커피. /최갑수

강릉에서 즐기는 예술 체험

아이들과 함께 갔다면, 강릉 예술창작인촌에 가보자. 옛 경포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한지 공예, 도예, 자수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이 입주해 있다. 이들이 만든 다양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수며 유리공예 등 다양한 체험을 해 볼 수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떠나온 가족이라면 꼭 한번 찾아볼 만한 곳이다. 같은 건물 2층에 있는 동양자수박물관은 조선 궁중 유물 자수를 비롯한 우리 자수 300여 점과 중국 및 일본 등의 동양자수 110여 점을 전시한다. 자수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껴볼 수 있다.

정동진 가는 길에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는 산언덕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은 종합 예술 공간이다. 갤러리뿐만 아니라 조각 공원, 호텔 등이 자리한다. 활엽수 가득한 길을 따라가면 소나무 정원이 펼쳐지고 곳곳에 설치미술품이 놓여 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닮은 조각부터 매미 같은 곤충을 형상화한 작품, 다양한 모양의 추상 작품까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작품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야외뿐만 아니라 뮤지엄 호텔 전시실에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피노키오 작품이 전시된 피노키오 미술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사람 흉내를 내는 마리오네트 미술관 등도 챙겨 봐야 한다.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동해안 최대의 항구

주문진항은 동해안 최대 항구 중 하나다. 참모습을 보려면 귀항하는 어선과 수산물 중개인, 도매상, 관광객이 몰려드는 아침나절에 찾는 것이 좋다. 위판장 뒤편으로 좌판이 늘어선 어시장이 형성돼 있다. 새벽 배가싣고 온 오징어와 꽁치, 고등어 등을 싸게 살 수 있다. 

바닷가 안쪽으로는 건어물점이 많은데 평양, 광주, 부산 등의 상호가 붙어 있다.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항구인 만큼 일찍부터 전국에서 사람이 몰렸고, 자기 출신 지역을 따서 상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여행수첩

강릉의 장칼국수. /최갑수
강릉의 장칼국수. /최갑수
강릉을 대표하는 맛은 초당두부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특징. 사천항은 강릉에서도 물회로 유명한 곳. 포구를 따라 물회 집이 늘어선 물회 거리가 있다. 벌집칼국수는 직접 만든 수제 칼국수에 고추장을 풀어 끓인 얼큰한 육수를 부은 후 자른 김과 다진 고기 고명이 넉넉하게 올라가는 것이 특징이다. 직접 담은 고추장과 시중에서 판매되는 달콤한 고추장을 섞어 만든 고추장이 이 집만의 비결이라고 한다. 40년째 옛 문화여인숙 건물을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데, 예전 여인숙이었을 때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주문진에 있는 철뚝소머리집과 중앙시장 국밥골목에 있는 광덕식당의 소머리국밥도 유명하다.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