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중국이 자유화되면 미국처럼 변할 것으로 믿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미국이 중국을 닮아가고 있다.”

8월 11일(이하 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이 미국 경제체제를 ‘국가자본주의’로 바꾸고 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트럼프가 민간 기업의 수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이윤 일부를 요구하며, 심지어 지분까지 확보하는 모습이 국가 경제를 직접 통제하려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자유시장과 사유재산권은 오랫동안 미국 자본주의의 핵심 가치였다. 하지만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이 중국 공산당식 ‘국가 주도형 시장경제’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미국 내부에서조차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가 거세지는 모양새다.

트럼프의 경영 간섭, 美 내부서도 “선 넘었다”

이날 WSJ는 ‘트럼프식 국가자본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최근 엔비디아와 AMD가 트럼프 정부와 맺은 수출 수익 공유 합의를 꼽았다. 두 기업은 중국에 저사양 반도체 수출 재개를 허가받는 조건으로 각 품목 매출의 15%를 미국 정부에 지불하기로 했다. ‘수출 통행세’인 셈이다. 그 규모만 최소 20억달러(약 2조7710억원)로 추산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 기업이 수출 허가를 받기 위해 수익 일부를 정부에 지불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트럼프는 민간 기업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평소 코카콜라 애호가로 알려진 트럼프는 지난 7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코카콜라가 고과당 옥수수 시럽 대신 사탕수수 설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코카콜라는 올해 가을 미국 시장에 사탕수수 설탕을 넣은 제품을 출시하기로 했다. 

트럼프는 지난 5월 인도 내 생산 기지를 키우려는 애플을 겨냥해 “미국에서 판매되는 아이폰은 인도 등 다른 나라가 아닌 미국에서 제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애플은 최소 25%의 관세를 내야 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국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 4년간 미국 제조업에 총 6000억달러(약 831조원)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외국 기업의 인수합병(M&A)에도 적극 개입한다. 트럼프는 지난 6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미국 정부가 ‘황금주’ 1주를 무상으로 받도록 했다. 황금주는 단 한 주만으로도 회사가 결정한 내용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 주식이다. 이를 두고 국제 문제 전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전통적인 민간 자본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국가 주도 모델”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미국 정부의 인텔 지분 인수 과정은 트럼프식 국가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트럼프는 립부 탄 인텔 CEO가 중국 공산당 및 인민해방군과 연계됐다며 사퇴를 압박했고, 이에 놀란 탄 CEO는 즉각 워싱턴 D.C.로 날아가 “나는 중국 간첩이 아니다”라고 직접 해명해야 했다. 트럼프는 이 자리에서 사퇴 요구를 철회했지만, 사실상 그 대가로 인텔이 받을 보조금을 주식으로 전환해 정부가 인텔 지분 10%를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탄 CEO는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자란 화교로, 미국 시민권자다. 

트럼프의 행보를 두고 미국 내부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1기(2017~2020년) 정부 때 부통령을 지냈던 마이크 펜스는 블룸버그TV와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가 일본제철의 황금주를 확보하거나 인텔의 지분 인수를 추진하는 등의 전략을 취하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 UC 버클리 교수는 “이것(트럼프의 국가자본주의)은 파시즘의 한 단면”이라며 “트럼프의 또 하나의 권력 장악 시도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기업 단체는 침묵⋯브레이크 없는 트럼프

문제는 트럼프식 국가자본주의에 제동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CNN은 8월 20일 “트럼프가 민간 기업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있음에도, 기업 단체가 공개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보도했다. 가령, 미국 최대 기업 로비 단체인 미국상공회의소는 작년까지만 해도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이 신용카드 연체료를 월 8달러(약 1만1170원)로 제한하려 하자, ‘법적 권한을 넘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최근 트럼프의 민간 기업 개입에는 침묵하고 있다.

미국 대기업 CEO 수백 명을 대표하는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역시 과거에는 대통령의 세금과 환경 규제를 ‘권한 남용’이라고 비판했지만, 올해는 트럼프의 정책 변화에 대해 어떤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CNN은 “트럼프의 자유시장 침해에 대해 두 단체에 수차례 논평을 요청했지만,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미국식 국가자본주의, 중국보다 낫다는 보장 없어”

트럼프의 국가자본주의의 진짜 문제는 미국 경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WSJ는 국가자본주의의 맹점으로 비효율성을 꼽으며 “국가는 민간 시장만큼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러시아·브라질·프랑스 등 국가자본주의를 표방했던 국가가 미국보다 훨씬 느리게 성장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고 분석했다. 

국가자본주의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중국조차, 표면적 성과와 달리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배리 노턴 UC 샌디에이고 교수는 “중국이 1979년 개혁·개방 이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국가가 아니라 시장의 힘 덕분”이라며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때는 국가 개입이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013년 시진핑의 국가주석 취임 이후 정부의 경제 통제가 강화되면서, 중국의 성장률도 점차 둔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노턴 교수의 분석이다.

WSJ는 “미국식 국가자본주의가 중국보다 낫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를 전 사회 차원의 시스템으로 운영하며, 베이징이 지방정부와 기업의 당위원회에 간부를 직접 파견해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내리는 구조다. 반면, 미국은 백악관 발표에 의존할 뿐, 정책이나 제도적 틀이 부족해 국가 개입의 일관성이나 체계 면에서 중국보다 오히려 뒤처진다는 것이다. 중국 전문가인 댄 왕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은 WSJ에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의 핵심은 ‘규율’인데, 트럼프는 정반대”라고 전했다. 

Plus Point

트럼프 “기업 지분 인수 자주 있을지도” 떨고 있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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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인텔 지분 10% 인수를 발표한 8월 22일, 트럼프는 공개 석상에서 “앞으로 이런 거래를 자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정부가 지분 일부를 확보하는 방식이 반복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트럼프 정부는 미국 방산 기업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 장관은 8월 26일 CNBC 인터뷰에서 “가령 록히드마틴은 매출의 97%를 미국 정부로부터 얻고 있다. 사실상 정부의 일부” 라며 “국방부 차원에서 (방산 기업 지분 인수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미국에 진출해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반도체 칩과 과학법(칩스법)에 따라 삼성전자는 47억4500만달러(약 6조5742억원), SK하이닉스는 4억5800만달러(약 6346억원)의 보조금을 받기로 돼 있는데, 인텔 사례처럼 미국 정부가 보조금의 대가로 지분 확보를 요구할 수 있어서다. 로이터통신은 8월 19일 “러트닉 장관이 칩스법 보조금을 지원받아 미국에 공장을 짓는 기업의 지분을 정부가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는데, 그 대상 후보로 미국 마이크론, 대만 TSMC, 한국 삼성전자를 거론했다. 만약 삼성전자가 인텔과 동일한 조건으로 지분을 요구받을 경우, 지분 약 1.6%를 내줘야 할 수 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보유 지분(1.65%)과 맞먹는 규모다.

김우영 기자
이코노미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