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025년 8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국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시작은 8월 15일(이하 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알래스카 정상회담이었다.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스티브 위트코프 특사에게 휴전을 위한 포괄적 제안을 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성사된 회담이었다. 알래스카가 회담 장소로 결정되면서 러시아가 우위를 점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과거 이 지역이 러시아 영토였기 때문이다. 애초 러시아는 아랍에미리트(UAE)를 선호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장거리 비행을 꺼려 중간 지역인 알래스카가 회담 장소로 결정됐다.
미국과 러시아는 정상회담 이전 서로의 요구 조건을 교환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영토 포기를 전제로 현재 전선에서 휴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러시아 요구의 핵심은 돈바스다. 돈바스는 도네츠 분지의 줄임말로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두 개 주를 뜻한다. 이 지역에는 대량의 석탄 및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다. 과거 제정(帝政) 러시아 시절부터 각종 중화학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현재 러시아는 루한스크 전체와 도네츠크의 75%를 점령하고 있다. 사실상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도네츠크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정상회담은 예상보다 빨리 종료됐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동안 러시아가 요구하던 사항과 비교하면 현실적이며 충분히 타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8월 8일 푸틴 대통령에게 휴전을 강한 어조로 요구한 바 있으며, 만약 러시아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광범위한 2차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일단 러시아가 반응을 보인 만큼 미국은 자국의 압박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미·러 휴전 협상 급물살에 다급해진 우크라이나
미국과 러시아가 구체적인 휴전 조건을 좁혀가자 우크라이나는 다급해졌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과 러시아의 정상회담 자체는 동의하지만, 영토 포기는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헌법은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영토 변경을 승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내부적으로는 영토와 평화를 교환하는 것에 대해 점차 찬성 의견이 증가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82%가 영토를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2025년에는 이 비율이 52%로 급감했다. 우크라이나에 가장 중요한 건 영토를 포기할 경우 ‘러시아가 추가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안전보장을 받아내는 것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 우크라이나는 자국 영토에 남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국제적인 안전보장을 받는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를 체결했지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당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만큼 이런 상황을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정상회담을 통해 양보를 통한 휴전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에 대해 유럽연합(EU) 정상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구체적인 조건이 충분히 협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서둘러 발을 뺄 경우 유럽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해서다. 이에 따라 EU 정상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상당 부분 책임질 테니 미국도 자국의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그동안 경험으로 파악한 EU 정상과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에는 철저하게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택했다.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다. 이들의 노력에 트럼프 대통령도 우려와 달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과 EU는 영토와 안전보장을 교환하는 형태로 휴전 협상을 진행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를 위한 세 가지 사항에 합의했다. 첫 번째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정상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을 개최하기로 했다. 단순히 미국과 EU의 합의 사항이 아닌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푸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참석여부를 확인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연히 푸틴 대통령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지만 러시아를 잘 아는 핀란드는 과연 러시아가 참여할지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두 번째 우크라이나 안전보장에 미국이 참여하기로 했다. 유럽이 지상군 병력 파병을 포함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미국은 공중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큰 틀에서 합의했으며, 세부적인 사항은 조만간 공식화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어떤 형태로든 미국과 EU 병력이 우크라이나에 배치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드러낸 상태다. 세 번째 우크라이나는 안전보장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900억달러(약 125조원) 규모의 무기를 구매하기로 약속했으며, 대신 미국도 우크라이나의 드론 프로그램에 대해 500억달러(약 70조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EU와 관계 강화로 역량 키워야
큰 틀에서 휴전을 위한 조건이 구체화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순순히 포기할지 여부다. 우크라이나는 2015년 돈바스 분쟁 이후 도네츠크 지역에 대규모 요새 벨트를 구축했는데, 도네츠크 북쪽의 슬로비얀스크에서 시작, 크라마토르스크를 거쳐 남쪽의 드루즈키우카, 콘스티안티니우카까지 뻗어 있다. 특히 슬로비얀스크, 크라마토르스크 등 도시지역은 방어 거점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우크라이나로서는 이 지역을 포기할 경우 이후 러시아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하기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가 구축한 시설을 거점 삼아 다음 공격을 준비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3년 넘게 전쟁을 지속해 온 우크라이나로서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지속적인 공세로 방어선이 약화하고 있지만 병력 부족으로 제대로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최전선에 투입된 우크라이나 병력의 연령은 40대를 넘어 50대 중반까지 올라갔다. 우크라이나는 결국 영토와 안전보장을 교환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안전보장의 규모와 기한은 여전히 모호한 상황이다. 안전보장과 관련해 우크라이나와 EU는 일단 우크라이나 군 병력이나 보유 장비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EU 차원 또는 개별 국가가 우크라이나와 상호방위조약 등을 체결하는 방법으로 우크라이나에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에 독일, 프랑스, 영국의 지상군 배치 여부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로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지상군 배치가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 영토를 상실할 경우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어둡다는 주장이 많지만, 정치 불안의 원인이었던 돈바스 지역이 러시아로 병합될 경우 자국 내 친러 세력과 갈등이 자연스럽게 소멸될 가능성도 있다.
중요한 건 우크라이나가 EU와 관계를 강화하고 효과적인 개혁을 통해 자체적인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서방과 결속을 강화하고 지원에 상응하는 변화를 보여준다면 EU와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전보장을 지속할 것이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안전보장은 유명무실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영웅적 투쟁을 뒤로하고 이제 우크라이나에는 어쩌면 전투보다 더 힘든 재건과 개혁이라는 또 다른 과제가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