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쇄빙선(icebreaker)은 배의 자체 무게로 얼음을 깨서 다른 배의 항로를 연다. 역사상 최초의 쇄빙선은 14세기 벨기에 운하 도시 브뤼헤(Brugge)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 쇄빙선을 가장 적극 활용하는 나라는 러시아다. 그런데 현대에 이 쇄빙, 즉 ‘아이스브레이킹(Icebreaking)’이란 말이 더 많이 쓰이는 곳은 사회생활일 것이다. 처음 만나 경직되고 서먹한 관계를 얼음 깨듯 분위기 좋게 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 말은 15세기 영국에서 토머스 노스(Thomas North)라는 사람이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의 역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썼다.
# 협상을 뜻하는 영단어 ‘네고시에션(ne-gotiation)’의 어원은 라틴어 ‘네고티움(ne-gotium)’이다. ‘바쁨’ ‘쉴 틈 없음’ 그리고 ‘사업’이라는 뜻이 있다. 이 말은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로 흘러들었는데, 15세기쯤부터는 ‘다른 사람과 거래’라는 뜻을 가졌다가, 시간이 지나 거래 과정인 ‘협상’이라는 의미도 품게 됐다고 한다. 1997년 외환 위기 직전 ‘로이터’ 등 외신에는 “오늘 대우그룹은 BJR을 선언했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BJR은 ‘배 째라’ 의 약자로, 한국발(發) 국제금융 용어가 생겨난 셈이다. 당시 대우는 BJR을 선언하고 채권단 협상에서 원금 이자를 깎는 등 ‘벼랑 끝 협상’ 전술을 잘 구사했다고 한다.
# 993년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해 평안남도 안주(安州) 일대까지 내려오자,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 땅을 떼어 주고 강화(講和)를 맺자는 의견이 나왔다. 서희(徐熙)는 전쟁 중이던 송나라의 우방 고려를 쳐서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거란의 목적을 간파하고, 회담에 직접 나섰다. 소손녕은 거란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니, 고려가 점거한 옛 고구려 땅을 거란에 바치고 국교를 맺으라고 압박했다. 서희는 고려의 이름부터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맞서며,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고 싶어도 압록강 일대 여진족 때문에 할 수 없으니, 거란이 여진족을 물리쳐 주고, 그 지역(강동 6주)을 넘겨주면 거란과 화친하고 거란 연호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소손녕은 이에 합의하고, 철수했다. 소손녕이 철수한 뒤 고려는 이 일대에 성을 쌓아 요새화했고, 이 요새를 이용해 거란의 재침(再侵)을 여러 번 막아냈다. 오늘날에도 큰 평가를 받는 서희의 협상 비결은 △첫째, 상대방의 진짜 의중(정복보다는 복속)을 파악하고 △둘째, 상대방이 원하는 명분(거란 연호 사용 등 표면상 복속)을 줬으며 △셋째, 이런 양보의 대가로 실리(강동 6주 확보)를 챙긴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일본 말 ‘무데뽀(無鐵砲)’의 유래로 많이 언급되는 역사가 있다. 일본에 조총이 처음 들어 온 건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서다. 이후 조총은 일본에서 현지화됐고, 1579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나가시노(長篠)에서 조총 3000정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를 앞세워 그때까지 최강이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의 기병대를 궤멸시켰다. 당시 조총은 ‘철포(鐵砲·텟포)’라고 불렸는데, 여기에 ‘없을 무(無)’를 붙여 조총 없이 전쟁에 나가는, 다시 말해 ‘계획 없이 무모한 성향’을 가리키는 말로 활용됐다는 설(說)이다. 무데뽀라는 말에서 장대한 전쟁 장면을 떠올리는 많은 사람은 이 유래를 좋아하나, 사실 무데뽀는 대책 없음을 의미하는 ‘무수법(無手法· 무텟포)’에서 유래한 당자(当字·본래 뜻과 무관하게 소릿값에 맞춰 한자로 적는 것)로 보는 설이 더 유력하다.
2025년 1월 출범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는 관세를 무기로 세계무역 질서를 재편하는 중이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기치로 각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데, 기존 무역 질서인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것은 유명무실한 것이 됐다. 필자 주위의 경제학자는 이를 가리켜 무데뽀라고 한다. 정말로 일견 무모해 보이기는 하나, 원래 뜻인 ‘무대책’ ‘무계획’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치밀한 계산으로 준비된 이 정책은 미국 산업 보호와 외국 투자 유치, 중국 견제, 세계 리더 수성 등 여러 목적이 있는 듯하다.
각국 관세 협상에서 미국은 여러 정교한 협상 기법도 사용했는데, 대표적인 게 ‘니블링(nibbling)’이다. 니블링이란 ‘야금야금 갉아먹는다’는 뜻으로,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여러 요구를 제시하고, 상대방이 그중 무엇이라도 들어주면 다른 요구를 또 제시해서 차례대로 최종 요구까지 관철하는 방법이다.
8월 25일(이하 현지시각) 한미 양국 정상이 백악관에서 만났다. 대통령실의 자화자찬성 평가와 대체로 긍정적인 여론조사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의 실질적인 결과는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회담 이후 양국 정상 간 아이스브레이킹이 큰 성과라고 얘기하지만, 야당은 맹공을 퍼붓고 있다. 야당은 회담 후 공동성명 및 합의서 부재와 철강, 반도체 등 고율 관세 부과 품목의 관세 인하 진척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또 7월 30일 실무 협상단이 동의(3500억달러 투자 펀드)한 것에 재계가 1500억달러 추가 대미 투자를 약속해 투자 규모가 일본은 물론, 유럽연합(EU) 전체가 약속한 것보다 많다고도 성토한다. 쌀과 소고기 수입을 막았다는 어구도 보이지 않았다고 야당은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전 ‘숙청’과 ‘혁명’이란 말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려 기선을 잡은 뒤 회담을 주도했다. 회담 후 트럼프는 “그들(한국)은 (관세 협상에) 뭔가를 할 수 있을지를 모색했으나 결국 합의했고, 그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했다. 전형적인 니블링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양국 정상의 만남은 시작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현재 동의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40%에 해당하는 투자 규모와 관세율(15%)은 사실상 지속하기어렵다. 재협상을 위해 우리 측에 필요한 준비와 기술은 무엇일까. 먼저 협상 팀을 보강해야 한다. 이념 성향과 관계없이 관계 및 재계에서 동원할 수 있는 유능한 인사와 협상 기술자를 합류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서희의 협상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 △첫째, 미국 측의 신뢰 확보가 선결 과제다. 예컨대 친중 성향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천명해 미국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반도체·조선 등 미국의 중국 견제에 필요한 분야에 대해 최대한 협력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안미경중(安美經中) 기조를 버린다고 공개 천명하고, 조선 협력 확대를 강조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둘째, 일단 신뢰 확보가 됐다고 판단되면, 이를 기반으로 우리 측 요구 사항을 당당히 밝혀 실리를 챙길 필요가 있다. 미국 내 공장 시설이 완성될 때까지 고율 관세 부과를 미룰 수 있도록 요청하는 일 등이다.
△셋째, 대미 투자 관련해 기업이 개정 상법으로 빠른 실행이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투자 시한을 최대한 늘리고, 필요하다면 BJR방법을 쓰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 측도 양국 정상 간 신뢰 확보와 큰 원칙 합의를 전제로 끊임없는 재협상을 요구하는 우리 식 니블링 기법을 활용해도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