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제적으로 미국에 공장을 세우고, 주요 부품의 55% 이상을 미국산으로 채웠다. 한국 기업이 미국의 전기차 충전기 시장에서 테슬라를 비롯한 현지 기업을 제친 비결이다.”
SK그룹 전기차 충전기 기업 SK시그넷의 김종우 대표는 최근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의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대 정책(NEVI) 사업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한 배경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실제로 올해 6월 기준, SK시그넷은 NEVI 보조금을 받는 충전소 1019곳 가운데 200곳에 충전기를 공급해 점유율 20%를 기록, 테슬라(10%)를 넘어섰다. NEVI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일찌감치 현지 기업과 함께 미국산 철강으로 만든 충전기 케이스를 개발하고, 현지에 자체 제조 공급망을 구축한 게 시장 선점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문제는 최근 미국 시장의 전기차 캐즘(chasm·혁신 제품이 대중화하기 전 일시적으로 수요가 정체되는 것) 장기화와 미국 정부의 관세정책 여파로 사업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SK시그넷의 대응책과 글로벌 시장 진출 계획 등을 김 대표에게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 NEVI 프로그램에서 SK시그넷의 점유율이 어떻게 되나.
“지난 6월 말 기준 NEVI 프로그램 보조금을 받는 충전소 1019곳 가운데 200곳에 충전기를 공급하며 점유율 약 20%를 기록, 1위를 차지했다. 우리가 기술력, 현지화 전략,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미국 시장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입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전기차 충전기 시장에서 1위라고 봐도 되나.
“1위라고 단정하긴 조심스럽다. 다만 NEVI 프로그램이 연방 정부가 주도하는 대표적 급속 충전 인프라 사업인 만큼, 우리가 이 시장에서 확보한 점유율과 기술·생산 역량이 단순한 설치 수를 넘어, 미국 급속 충전기 시장의 방향성을 이끄는 경쟁력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해외 기업이 NEVI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나.
“일명 ‘빌드 아메리카(Build America)’ 조건을 따라야 한다. 단순히 미국에서 조립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미국산 철강·철 구조물을 사용하고 주요 부품의 55% 이상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한다. 우리는 2022년부터 현지 제조사와 협력해 미국산 철강 충전기 케이스를 개발했고, 2023년 하반기부터 이를 적용한 제품을 양산했다. NEVI 프로그램뿐 아니라 민간 급속 충전 시장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한 배경이다.”
테슬라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비결은.
“현지화, 기술 차별화, 선제적 투자 전략 덕분이다. 우선 앞서 설명한 빌드 아메리카 요건에 가장 먼저 대응한 것이 큰 힘이 됐다. 여기에 미국 현지 충전 사업자와 파트너십을 맺고 현지 생산 기반을 확보해 공급 안정성까지 높였다. 이를 테면 2022년 NEVI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1500만달러(약 209억원)를 투입해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 현지 공장을 세웠다. 이곳에서 NEVI 프로그램의 요구 조건을 충족하는 고성능 충전기를 개발, 600㎾(킬로와트) 파워 캐비닛(전력을 모아 여러 충전기에 나누는 장치) 하나로 400㎾ 충전기 두 기 이상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효율적 설계를 구현해 냈다.”
성능 측면에서 테슬라 충전기보다 어떤 점이 뛰어난가.
“테슬라 슈퍼차저가 최대 350㎾까지 지원하는 반면, 우리는 400㎾까지 가능하다. 충전 규격도 다양해 호환성이 넓다. 방수 등급은 테슬라가 IP54, 우리는 IP55로 한 단계 높다. 차량 호환성도 테슬라 중심이 아니라 다수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와 호환성도 갖췄다. 커플러(충전 케이블) 길이 역시 5m로, 2~3m 수준인 테슬라보다 다양한 차종에서 충전 편의성이 뛰어나다.”
미국 정부가 관세 조치를 본격화했는데 미국 진출 기업으로서 타격은 없나.
“일부 완제품과 부품이 무(無)관세에서 유(有)관세로 전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찌감치 미국 내 현지 공급망을 구축해 핵심 부품 수입이 받을 영향은 최소화했다. 현재 관세는 한국에서 들여오는 일부 반제품에만 제한적으로 발생한다. 보조금 요건이 붙은 NEVI 제품은 텍사스 공장에서 만들어 관세 부담을 줄이고, 요건이 없는 일반 제품은 한국에서 생산해 비용을 아끼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면 수익성이 악화할 텐데.
“미국산 부품은 국산 대비 1.5~2배가량 비싸긴 하지만, 미국에서 생산·판매하는 모든 업체가 겪는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99% 이상의 높은 가동률로 기술경쟁력을 확보하고, 설계 효율화로 25% 이상 원가 절감에 나서고 있다. 아울러 현지 부품을 쓰면 NEVI 프로그램 보조금 요건을 충족하고, 관세 부담을 줄이며, 공급망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비용이 조금 늘더라도 수익성에는 큰 문제가 없다.”
최근 전기차 캐즘과 보조금 정책 변화 등 시장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대응책이 있나.
“실제로 올해 초 연방 정부가 NEVI 사업 지원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렸지만, 최근 연방고속도로청(FHWA)이 지침을 재정비하며 약 50억달러(약 7조원) 규모의 지원이 재개된 바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NEVI 사업에만 의존하지 않고 주(州)·지방정부가 주도하는 인프라 사업으로 비즈니스를 다변화하고 있다.”
차세대 충전기인 MCS(메가와트 충전 시스템) 개발은 어떻게 진행 중인가.
“MCS는 2027~2028년 개발을 완료할 계획이다. 전기 트럭·버스 등 상용 전기차를 위한 초고출력 충전을 지원할 전망이다. 기존 350㎾ 급속 충전보다 10배 이상 높은 3.75㎿(메가와트) 출력이 가능할 것이다. 개발에 성공한다면 글로벌 상용차 시장에서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고, 주요 완성차·물류 기업과 협업까지 확대할 수 있다.”
최근 세계 최대 전기차 충전 네트워크 운영사인 허브젝트와 ‘플러그앤드차지(PnC)’ 기술 협약을 맺었다. PnC란 무엇이며, 일반 사용자에게 어떤 이점이 있나.
“PnC는 전기차 사용자가 커넥터만 연결하면 별도의 앱 조작이나 카드 인증 과정 없이 충전 및 결제까지 자동으로 이뤄지는 차세대 인증 기술이다. 즉, 충전 커넥터를 차에 꽂는 것만으로 충전과 결제가 자동으로 진행된다. 또한 강력한 암호화 통신으로 해킹 위험도 차단할 수 있다. 특히 글로벌 1250여 개 제휴 브랜드 충전소와 연결돼 있어 국내외 어디서나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미국 외 신규 해외 시장 진출 계획은.
“현재 유럽과 멕시코에도 진출해 미국 의존도를 낮추고자 한다. 중국은 향후 상황에 따라 진출을 검토할 것이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는 속도의 문제이지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는 기조 아래 정책 수요와 민간 수요를 동시에 겨냥해 장기 성장 기반을 다져가겠다.”
전기차 충전 초대형 인프라 사업 ‘NEVI’
7兆 투입…美 전역에 충전소 50만 기 설치
2021년 조 바이든 정부에서 시작된 NEVI 사업은 ‘National Electric Vehicle Infrastructure(국가 전기차 충전 인프라)’의 약자로, 미국 전역에 전기차 충전소를 설치하는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말한다. 고속도로에 50마일(약 80㎞) 간격으로 150㎾급 급속 충전기를 최소 네 기 이상 설치하는 것이 핵심으로, 2026년까지 총 50만 기 이상의 충전소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NEVI 프로그램은 총사업비만 50억달러(약 7조원)에 달한다. 연방 정부가 주 정부에 보조금을 배분하고, 주 정부는 이를 충전 사업자에게 지급하는 구조다. 충전기 제조사는 이들에게 장비를 공급해 간접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다. 미국 내에서 NEVI 사업은 단순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충 사업이 아닌,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 제조업과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