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전략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2025년 8월 28일(현지시각) 자카르타에서 열린 RCEP 국제회의에서 중국 측 대표는 RCEP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RCEP는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하는 15개 회원국의 지역 경제통합체다. 전 세계 인구와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거대 FTA다. 다만 발효 3년 반이 지난 지금, RCEP의 가장 큰 문제는 이 FTA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는점이다. 회의 참석자들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RCEP가 당면한 과제, 회원국 확대와 활용률 제고
RCEP가 직면한 당면 과제는 회원국 확대와 활용률 제고다. 현재 RCEP 가입을 신청한 나라는 홍콩, 스리랑카, 칠레 그리고 방글라데시다. RCEP의 성공을 강력히 지원하고 있는 중국과 아세안은 확대에 매우 긍정적이다. 세계 최대 FTA 지위를 유지하고 영향력을 강화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규 회원국 지원 자격의 엄격성을 두고 회원국 간 인식 차이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홍콩이 가입하게 되면 RCEP가 중국 주도의 FTA가 되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활용률 제고는 RCEP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다. RCEP 활용률은 회원국 대부분에서 저조하다. 2023년 기준 중국의 RCEP 활용률은 수출에서 4.21%, 수입에서 1.46%에 불과하다. 베트남의 경우도 1.26%다. 같은 기간 베트남 전체 수출에서 FTA 평균 활용률이 33.6%인 걸 감안하면 RCEP 활용률이 얼마나 낮은지를 알 수 있다. 태국의 경우도 RCEP는 발효한 모든 FTA 중에서 여덟 번째 활용률에 머물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RCEP 활용률이 2023년 0.07%에 불과해 수출입 업체가 RCEP를 거의 활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과 일본의 활용률이 상대적으로 다른 회원국에 비해 높다고 하지만, 다른 FTA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RCEP 활용률이 낮은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RCEP는 발효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업의 인지도가 낮다. 새롭게 발효된RCEP에 대한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둘째, 개방 수준이 낮아 굳이 RCEP를 쓸 이유가 크지 않다. 예를 들어 한국 수출업자가 전자 제품(HS85)을 베트남으로 수출할 때 최혜국대우(MFN) 관세율은 10%, 한· 베트남 FTA를 적용하면 3%, 한·아세안 FTA는 5%가 된다. 그런데 RCEP를 활용하면 4%에 불과하다. 이 경우 수출업자는 한· 베트남 FTA로 수출하는 게 가장 유리하다. 전자 제품은 물론 대부분의 수출에서 RCEP의 관세 감축률이 다른 FTA에 비해 높지 않기 때문에 활용률이 저조하다. 셋째, 회원국의 행정절차와 통관 시스템이 아직 미흡하다. 모든 FTA의 관세율과 원산지 검증이 전산화, 자동화된 게 아니라면 신규 FTA는 활용률이 떨어진다. 결과적으로 RCEP는 ‘포괄적’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활용되지 않는 협정’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RCEP 주춤하는 동안 약진하는 CPTPP
2005년 개방성이 높은 뉴질랜드, 싱가포르, 칠레, 브루나이 간 체결된 P4협정은 2008년 미국, 호주, 페루, 베트남이 가입하면서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2010~2013년에 걸쳐 말레이시아, 멕시코, 캐나다, 일본이 차례로 가입하면서 12개국 체제가 됐다. 수년간의 협상 끝에 2016년 2월 최종적으로 TPP 서명이 이뤄졌지만, 2017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TPP에서 탈퇴했다. 이를 계기로 협정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이름을 바꾸고 일부 조항을 유예하면서 2018년 발효됐다. 여기에 브렉시트로 유럽연합(EU)을 탈퇴한 영국이 2024년 가입함으로써 다시 12개국 체제가 완성됐다. CPTPP의 가장 큰 특징은 높은 수준의 개방과 엄격한 규범이다. CPTPP는 상품 분야에서 대부분 품목에 대해 99% 수준의 관세를 철폐했으며 농산물, 자동차, 전자상거래, 금융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장 개방이 이뤄졌다. 또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ISDS), 국영기업 규율, 환경·노동 기준까지 포괄하고 있다. 활용률도 RCEP에 비해 월등히 높다. 가령 일본으로 향하는 캐나다의 수출에 대한 CPTPP 활용률은 2020년 88.1%에 달했다. 베트남의 경우 CPTPP 활용률은 7~8% 수준으로 RCEP보다 높다. 전반적으로 CPTPP 회원국 간 무역도 괄목할 만한 증가세를 보이면서 실질적인 공급망 강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RCEP와 CPTPP, 성격이 다른 FTA
RCEP와 CPTPP를 비교하면 CPTPP가 무역 창출 효과도 훨씬 크다. 개방도가 더 높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가장 큰 이유는 두 FTA의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CPTPP는 아시아·태평양(아·태) 지역에서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P4협정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높은 개방도와 규범성을 갖추고 있다. 반면 RCEP는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을 전제로 포용적이고 느슨한 경제협력을 지향한다. 아세안은 당시 한국, 중국, 일본, 호주·뉴질랜드, 인도와 각각 FTA를 체결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들 협정의 원산지 규정이 제각각이었다.
RCEP가 처음 태동한 가장 큰 이유는 기존에 체결해 있던 아세안+1 FTA를 통합해 통합 원산지 규정의 이점을 활용하자는 발상에서 비롯됐다. RCEP를 통해 역내 공급망을 단일 체계로 만들고자 했다. 아세안 중심성은 강화되고 개방도는 낮아졌다. 그래서 RCEP는 ‘세계 최대’라는 외형에 비해 내용은 ‘최저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서로 다른 길, 우리는 모두 활용해야
RCEP와 CPTPP는 아·태 경제통합의 서로 다른 길을 보여준다. RCEP의 장점은 포용성이지만, 바로 그 포용성이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아세안 중심성을 존중하는 만큼 합의 수준은 낮아지고 통합의 실질 효과는 미미하다. 반대로 CPTPP는 아세안이라는 틀을 무시하고, 높은 수준의 규범과 개방을 추구한다. 높은 개방 수준 때문에 실질 효과는 크지만, 규범의 엄격함으로 아무나 가입할 수 없다.
중요한 건 우리가 RCEP와 CPTPP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다. RCEP와 CPTPP는 상호 대체 관계라기보다는 보완 관계다. RCEP는 역내 공급망과 아세안 중심의 포용성을 유지하는 틀로, CPTPP는 글로벌 규범 경쟁에 대응하는 틀로 각각 의미가 있다. 아· 태 경제 질서는 다층적·복합적 규칙이 병존하는 ‘다극적 통상 질서’로 전개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한쪽에만 기대기보다 양쪽을 모두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한국은 CPTPP에 가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