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는 두 차례(제45·47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부동산 재벌이자 리얼리티 TV 스타로 유명했다. 그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정체성은 ‘트럼프 골프 제국의 수장’이다. 골프 마니아를 자처하는 트럼프는 핸디캡 2.8(파72 기준 약 74~75타 수준)로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골프 실력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속칭 ‘알까기(공이 없는 곳에 몰래 공을놓고 치는 행위)’의 달인이라는 증언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 25년간 그는 세계 곳곳에서 골프장을 인수·개발하며 ‘트럼프 골프’라는 거대한 브랜드를 일궈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11곳)과 스코틀랜드(2곳), 아일랜드(1곳), UAE(1곳), 오만(1곳), 인도네시아(2곳) 등 18곳으로, 운영 중인 곳은 16곳, 개발 중인 곳은 2곳이다.
짐 파지오와 플로리다주에 첫 코스 건설
트럼프가 본격적으로 골프장 개발에 뛰어든 것은 1999년이었다. 그는 유명 코스 설계가 짐 파지오와 손잡고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 첫 번째 코스를 만들었다. 이곳은 미국에 있지만 ‘트럼프 인터내셔널(Trump 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이후 트럼프는 톰 파지오, 잭 니클라우스, 그레그 노먼 등 세계적인 설계가와 선수를 끌어들여 프로젝트를 확장했다. 미국 내 코스는 대체로 ‘트럼프 내셔널(Trump National)’이라는 이름 뒤에 지역명을 붙이는 방식으로 권위와 국가적 상징성을 강조했다. 매년 메이저 대회 마스터스를 여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도 내셔널이란 이름을 붙여 ‘국가대표 골프장’이란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곳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트럼프 내셔널 도럴(Trump National Doral Miami)이다. 1950년대 말 부동산 개발 업자 알프레드 캐스켈이 아내 도리스와 자신의 이름을 합쳐 ‘도럴(Doral)’로 명명한 이 리조트는 90홀을 갖춘 대형 골프장이다. 트럼프가 2012년 파산 상태의 도럴 리조트를 1억5000만달러(약 2087억원)에 인수하면서 ‘트럼프 제국’의 핵심 무대가 됐다. 1962년부터 2016년까지 월드골프챔피언십(WGC) 캐딜락 챔피언십 등 미국 프로골프(PGA)투어 대회를 개최한 명문 코스다. 하지만 대회 후원사였던 캐딜락이 2016년을 끝으로 철수하면서 더 이상 PGA투어 대회를 열지 못했다. 2016년 미국 대선 동안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의 이민자 추방 등 차별성 발언을 두고 PGA투어 측과 갈등이 있었다. 이후 이 대회는 멕시코로 장소를 옮겼다. 하지만 내년 4월 30일(이하 현지시각) PGA투어의 신설 시그니처 이벤트(특급 대회) 마이애미 챔피언십이 도럴의 챔피언십 코스인 블루 몬스터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 대회는 총상금 2000만달러(약 278억원) 규모의 PGA투어 9개 시그니처 이벤트 중 하나다. 도럴에선 2022년부터 올해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의 후원을 받는 LIV 골프 대회가 열렸다. 뉴저지의 트럼프 내셔널 베드민스터는 트럼프 가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장녀 이방카가 2009년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트럼프는 2017년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US 여자 오픈을 직접 관람하며 우승자 박성현에게기립박수를 보내 화제가 됐다. ‘여름 백악관’ 이라 불릴 만큼 그와 가족이 자주 머무는 곳이자, 2022년 LIV 골프 대회가 열려 미국 골프계의 갈등을 드러낸 상징적 무대가 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의 트럼프 내셔널 로스앤젤레스는 태평양 절벽 위에 자리 잡아 ‘서부의 보석’으로 불린다. 원래 피트 다이 설계 코스였으나, 트럼프가 인수한 뒤 톰 파지오와 함께 새롭게 다듬으며 ‘트럼프식 럭셔리’를 상징하는 시설로 변모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트럼프 내셔널 필라델피아는 세계 최고 코스로 꼽히는 파인밸리 옆에 있다.

모친 메리 앤 매클라우드는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세계 최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야심을 그대로 드러낸 결과라고 해석한다. 플로리다주의 트럼프 내셔널 주피터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트럼프의 라운드 덕에 국제정치적 핫플레이스로 주목받았다. 트럼프의 모친 메리 앤 매클라우드는 ‘골프의 고향’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다. 트럼프는 이 뿌리를 강조하며 스코틀랜드에 상징적 코스 두 곳을 갖추고 있다. 그중 트럼프 턴베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링크스 코스 중 하나다. 트럼프가 2014년 인수하기 전까지 디오픈 챔피언십 개최지로 사용되며 네 차례 우승자를 배출했다. 하얀 등대로 유명한 아일사(Ailsa) 코스는 여전히 세계 100대 코스 최상위권에 꼽히지만 2009년 대회를 끝으로 남자 골프 메이저 대회인 디오픈을 다시 열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인수 후 인종차별 등 논란성 발언이 이어지자, R&A는 이곳을 디오픈 개최지에서 배제했다. 미국 대통령 자리에 복귀한 트럼프는 영국 정부와 R&A에 턴베리를 다시 디오픈 개최지로 선정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인터내셔널 스코틀랜드(애버딘)는 2012년 개장했다. 환경 훼손 논란과 지역 사회의 반발 속에 조성됐지만, 거대한 사구와 북해를 내려다보는 풍광으로 화제를 모았다. 올여름에는 새롭게 18홀이 추가돼 ‘뉴 코스’가 개장했고, 기존 코스는 ‘올드 코스’로 명명됐다. 이는 세인트앤드루스나 서닝데일 같은 명문 클럽의 전통적 작명 방식을 모방한 것이다. 개장 행사에서 트럼프의 장남 에릭은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36홀”이라고 자평했다. 아일랜드 서부 클레어주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둔벡(Doonbeg)은 제국의 또 다른 보석으로 꼽힌다.
대서양의 거친 바람과 30m가 넘는 모래 언덕, 수많은 포트 벙커가 어우러져 링크스의 진수를 보여준다. 첫 티에서 아이리시 위스키 한 잔을 권하는 전통은 이 리조트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두바이에 있는 트럼프 인터내셔널 두바이는 중동 최초의 트럼프 코스로, 미국의 유명 설계가 길 한스가 설계를 맡았다. 고급 주거 단지와 함께 조성돼 미국식 골프 문화를 중동에 수출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오만에서도 트럼프 인터내셔널 골프클럽 오만(AIDA)이 개발 중이다.
이는 중동 내 트럼프 브랜드 확장의 교두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보고르 지역의 트럼프 인터내셔널 리도가 어니 엘스 설계로 최근 문을 열었으며, 발리 지역에도 개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아시아 관광·휴양 산업과 결합한 트럼프식 글로벌 전략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트럼프 골프 제국’은 미국 대통령이 소유한 골프장이란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21세기 글로벌 골프 산업에서 권력, 브랜드, 정치가 얽히고설킨 거대한 드라마의 무대가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