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자는 대한민국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사회에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거쳐 사회인이 됐고, 마흔 즈음이 된 지금은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며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자연환경이 척박하거나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 혹은 과거 봉건사회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은 개인의 힘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사회라는 울타리와 제도가 있고, 그 속에서 교육받고 관계를 맺으며 성장한다. 어떤 사회에 태어났는지 그리고 그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한 개인의 삶을 빚어낸다.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변화에 저항하거나 벗어나려는 사람도 있다. 결국 삶은 사회와 맺는 관계의 결과물이다.

이 점을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Charles Wright Mills)는 이렇게 표현했다. “개인의 삶과 사회의 역사는 서로를 떼어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개인의 이야기는 곧 사회의 이야기이고, 사회의 변화는 곧 개인 삶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닐까.

사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지금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새로운 기술과 가치의 전환, 급격한 환경과 인구구조 변화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달라지는 오늘날, 우리는 늘 변화를 마주한다.

삶과 음악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

클래식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지만, 이 문제를 음악 속에서 자주 떠올린다. 음악도 사회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음을한 인간의 생명에 비유한다면, 그 음이 담기는 형식은 사회와 같다. 음과 형식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음악은 전혀 다른 흐름과 의미가 있다. 

형식의 질서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도 있고, 형식을 조금씩 바꿔 새로운 길을 만들 수도 있으며, 때로는 형식을 완전히 깨뜨리고 전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음악학자 크리스토퍼 스몰(Christopher Small)은 이를 더욱 넓게 해석했다. 그는 “음악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활동이다” 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음악은 단순히 완성된 무언가가 아니라, 작곡과 연습·연주·청취는 물론, 무대를 준비하고 표를 받는 모든 과정까지 포함하는 관계적 행위라는 것이다. 스몰은 이를 ‘뮤지킹(musicking)’이라 불렀다. 결국 음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 만나고 관계 맺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그래서 음악은 사회적이며, 우리의 정체성과 공동체를 드러내는 특별한 의식이다.

음악사에는 수많은 형식이 있다. 소나타, 변주곡, 론도, 푸가….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이 형식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고쳐지고, 해체되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을 거쳤다. 또 스몰의 시각에서 본다면, 음악이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도 시대마다 크게 다르다. 이는 역사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순응, 개혁, 혁명과도 닮아 있다. 결국 삶과 음악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최근 독주회를 준비하며 몇몇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던 중 이런 생각과 매우 가까운 작품을 만났다. 바로 하이든의 F단조 변주곡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이다.

1793년, 58세의 하이든이 작곡한 F단조 변주곡은 원래 ‘소나타’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소나타 형식은 18세기 이후 서양 고전음악에서 가장 중심적인 작곡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두 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이를 발전·대조시키며 다시 재현하는, 일종의 음악적 기승전결 구조다. 실제로 하이든의 자필 악보에도 ‘Sonata’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약 145마디에서 소나타처럼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 곡에, 하이든은 무려 80여 마디에 이르는, 폭발적인 에너지의 환상곡 풍 코다를 덧붙였다. 그 결과, 곡은 단순한 소나타 악장이 아니라 독립적인 변주곡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하이든이 이미 완성된 소나타 형식을 다시 해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들을 때마다 안정된 삶의 궤도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미지의 여행으로 떠나는 장면이 떠오른다.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영역으로 향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기존 질서를 부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전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연주학 박사, 전 함부르크 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내면의 드라마를 극한까지 탐구한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1913년 발표된 초판은 장황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작곡가는 1931년 대폭 개정해 오늘날 연주되는 판본을 내놓았다. 당시 음악계는 무조와 12음 기법, 전자음악의 태동으로 전통적 조성 체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미술계에선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하며 전위예술의 충격을 던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는 아방가르드 흐름과는 달리, 오히려 18~19세기의 고전적·낭만적 전통으로 회귀했다. 그의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을 보아도 모두 소나타 형식, 즉 주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발전시킨 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구조에 충실하다. 후기 낭만주의적 화성을 사용했지만, 기능화성의 토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새롭고 전위적인 것을 추구하던 시대에, 라흐마니노프는 베토벤의 시대에 머무르는 것 같은 보수적인 길을 걸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오히려 그의 독창성을 느낀다.

라흐마니노프는 형식에 갇힌 것이 아니라, 형식에서 인간적 감정과 내면의 드라마를 극한까지 탐구한 것이라고. 피아노 소나타 2번의 첫 악장은 단 세 개의 음(F–E–E♭)으로 시작한다. 단순한 반음계 동기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변주와 확장을 거듭한다. 이 동기는 하강하면서 절망과 무기력을 상징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면 상승으로 변하며 마지막엔 장엄하게 하늘로 솟구친다. 이는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을 견디며 다시 일어선 인간의 의지와 용기를 닮아 있다. 라흐마니노프 자신도 우울증과 망명, 상실을 겪었지만, 음악을 통해 극복할 힘을 길러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단순한 보수적 산물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증언으로 남는다. 하이든이 형식을 해체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었듯, 라흐마니노프는 형식을 고수하며 그 안에서 인간적 진실을 끝까지 파고들었다. 정반대 선택처럼 보이지만, 두 작곡가 모두 삶과 음악의 형식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담고 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자주 생각한다. 이들이 어떻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음악을 발견하고 꽃피울 수 있을까? 변화하는 사회의 형식에서 자기 음악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까? 하지만 자기 것만 고수하다 고립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형식은 오늘도 죽고, 살고, 변화한다. 그러나 그 고리에서 음악은 다시 태어나고, 삶은또 다른 빛을 얻는다고 믿는다. 음악에서 배운 이 통찰을 삶에서 되새기고, 삶에서 얻은 성찰을 음악 안에서 다시 되새길 때 비로소 오늘의 삶을 다른 빛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안종도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