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더 무비. /사진 워너 브라더스
F1 더 무비. /사진 워너 브라더스

정적과 긴장 속에서 다섯 개의 빨간 불빛이 하나씩 켜진다. 모든 불이 밝아졌다가 예측할 수 없는 순간 꺼지는 찰나, 폭발하는 듯한 엔진음과 타이어 스핀 소리가 뒤엉키며 레이스가 시작된다.

지난 6월 개봉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F1 더 무비’에는 두 개의 레이스가 교차한다. 하나는 포뮬러1(F1) 경기, 다른 하나는 한 개인의 삶이다. 영화는 두 궤적의 움직임과 위기 극복의 과정을 1000분의 1초를 다투는 그랑프리 서킷 위에 겹쳐 놓는다.

주인공 소니는 한때 촉망받던 드라이버였지만, 치명적인 사고로 은퇴한 뒤, 이혼과 도박 중독으로 방황한다. 어느 날 그는 오랜 동료의 제안으로 매각 위기의 약체 팀 APXGP에 합류해 다시 핸들을 잡는다. 하지만 복귀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그를 구식이라 치부하는 팀원의 시선, 성능 개선이 시급한 자동차 그리고 번번이 빗나가는 전략까지. 소니는 이 모든 난관을 넘어야 한다.

비록 속도는 다르지만, 전성기와 추락, 복귀와 도전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은 F1의 궤적과 닮았다. 직선 구간인 DRS 존에서는 윙을 열어 가속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시케인 구간처럼 속도를 줄여 균형을 다잡아야 하는 커브 구간도 있다. 질주의 한가운데에서도 멈춤은 피할 수 없다. 피트 레인에서 장비를 교체하는 순간은 곧 다음 질주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결승선을 향한 싸움은 결국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내적 경주다.

영화는 이 레이스의 목표가 일시적인 부와 명예가 아님을 말한다. 단골 레스토랑에서 동료에게 제안받은 뒤, 소니는 웨이트리스에게 자신의 복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얼마나 준대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답한다. “그러면 뭐가 중요하죠?”라는 되물음에 그는 침묵한다. 영화는 그 대답이 결국 매 순간을 즐기는 태도 그리고 그로부터 피어나는 영속적인 자유임을 가리킨다.

자동차와 일체화된 인간

F1 레이스와 인생의 과정이 포개지는 관점은 자동차와 하나 된 인간 모습에서 선명해진다. 그 일체감은 무엇보다 신체와 차체의 공간적 관계에서 비롯된다. F1 자동차는 공기역학적 효율을 위해 여분의 공간을 철저히 덜어내고, 차체를 낮고 매끄러운 유선형으로 다듬는다. 드라이버는 자기 몸을 본떠 제작된 탄소섬유 시트에 눕듯이 끼워져, 어깨와 팔, 다리까지 차체와 한 몸처럼 밀착된다. 그 결과 인간과 기계는 속도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이 상태에서 드라이버는 주행 중 자동차안팎의 자극을 즉각 감지한다. 타이어 마모, 커브에서 앞뒤축이 주고받는 하중, 차체를 따라 흐르는 공기까지 연장된 감각기관처럼 드라이버에게 전달된다. 그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팀과 교신하며 박스 진입이나 세팅 조정 같은 전략을 실시간으로 결정한다. 여기에 더해 엔진 폭발음, 타이어 마찰음, 바람이 압축되는 소리, 제동과 변속의 리듬이 청각을 자극하면서 인간과 기계의 일체감은 절정에 이른다. 영화는 후반부에 돌연 모든 소리를 거두고,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는 소니의 시점만을 남긴다. 정적 속에서 그는 한 마리 새처럼 트랙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인생의 레이스에서 추구하는 자유의 감각을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 코넬대 건축대학원 석사,서울대 건축학과 출강, 전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스위스 바젤 사무소 건축가

자동차와 하나 된 건축

이처럼 자동차와 인간이 결합하듯, 자동차와 건축이 하나로 맞물린 사례가 있다. 바로 1923년 이탈리아 토리노에 완공된 피아트의 링고토 공장이다. 피아트 설립자 조반니 아녤리는 디트로이트의 포드 공장을 견학한 뒤,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한 현대식 공장을 짓기로 했다. 그는 조선 공학자 출신 엔지니어에게 설계를 맡겨 길이 500m, 높이 5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축물을 완성했다. 약 1만2000명의 노동자가 3교대로 근무하며 끊임없이 생산 주기를 이어 갔던 링고토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한 공장이었다.

링고토가 진보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거대한 규모나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선구적 도입 때문만은 아니었다. 건축물 전체가 하나의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작동했다는 점에 있었다. 원자재는 1층에서 반입돼 다섯 개 층을 거치며 조립이 이어지고, 완성차는 옥상에서 곧바로 출고됐다.

표정한 박스형 건축물을 자동차와 결합된 존재로 완성한 것은 양단의 나선형 차량 경사로였다. 자동차는 각 층의 조립 라인을 마치자마자 이 우아한 경사로를 타고 옥상 시험 주행장으로 올랐다. 그 덕분에 생산에서 시험까지 과정이 공장 내부에서 이어질 수 있었다. 시험 주행을 마친 자동차는 다시 경사로를 내려와 전시장으로 곧장 진입했다. 무엇보다 압권은 1.5㎞의 옥상 트랙이었다. 양단의 곡선 구간은 부드럽게 오르내리며, 거대한 조각품을 연상시켰다. 이 독창적 풍경은 르코르뷔지에가 1952년 마르세유 유니테 아파트 옥상 경관을 구상하는 데 영감을 주기도 했다. 당시 영상 속 수많은 자동차가 도시 상공을 질주하는 장면은 링고토가 인간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자동차와 일체화된 거대한 생산 기계임을 웅변한다.

1, 2 과거 피아트 링고토 공장. Rare Historical Photos 3, 4 현재 피아트 링고토 공장. Dezeen
1, 2 과거 피아트 링고토 공장. Rare Historical Photos 3, 4 현재 피아트 링고토 공장. Dezeen

쇠퇴에서 재생을 향한 링고토의 레이스

60년 동안 80종의 모델을 생산하던 링고토도 기술과 산업의 진보 앞에서는 점차 구식이 돼 갔다. 공장은 레이스 중 피트 레인에 멈춰 선 자동차처럼, 1979년 마지막 생산을 끝으로 결국 1982년에 문을 닫았다. 거대한 산업 건축물을 어떻게 다룰지 치열한 공적 논쟁이 이어졌고, 국제 공모 끝에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재생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목표는 링고토를 다목적 공간으로 바꾸되, 외관을 유지해 건축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링고토의 전환은 한 번에 이뤄지지 않고, F1 레이스의 흐름처럼 여러 구간을 거치며 차근차근 이어졌다. 1992년 전시관 개관을 시작으로 회의장, 강당, 미술관, 호텔이 해마다 차례로 문을 열었다. 1997년에는 피아트그룹 본사가, 2002년에는 복합 쇼핑몰과 토리노 공과대학 자동차공학과가 입주했다. 각 시설은 전체 프로젝트가 완성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구역별로 완공과 함께 운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링고토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집합된 새로운 도시 거점으로 다시 태어났다.

옥상 위로는 투명한 유리 구체 회의실 ‘버블’과 넓은 차양을 얹은 상설 전시실 ‘보석상자’가 솟아올라, 트랙의 조각적 풍경을 부각시켰다. 링고토의 레이스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2022년 옥상 트랙은 전기차 전용으로 바뀌었고, 새롭게 조성된 28개의 녹지 섬에는 4만 그루가 넘는 자생식물이 심어졌다. 링고토의 심장은 이제 타이어 마찰음 대신, 시민의 발걸음과 식물의 호흡으로 뛰고 있다.

F1, 인생, 링고토의 궤적은 오늘날 도시 재생이 지녀야 할 태도를 일깨운다. 모든 것을 단번에 바꾸려는 조급함보다 시간을 두고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꾸준함이 도시를 지속적으로 숨쉬게 한다. 그 호흡은 트랙을 달리는 엔진의 리듬처럼, 멈춤과 이어짐 속에서 유연하게 미래로 나아간다. 

강현석 SGHS 설계회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