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대중음악을 아우르는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누굴까. 테일러 스위프트? 톰 크루즈? 둘 다 유력한 후보임이 틀림없지만, 인지도만 따지면 ‘넘사벽’인 인물이 한 명 있다. 참고로 그의 이름 앞에 놓인 오스카 트로피(아카데미상)가 10개, 에미상(세계 최고 권위의 방송상)은 14개나 된다.
정답은 레이 돌비(Ray Dolby)다. 레이 돌비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돌비’라는 이름과 알파벳 D 자와 뒤집힌 D 자를 나란히 놓은 로고(‘더블D’로 불리는)를 접한 적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십중팔구는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엔딩크레디트에서 보았거나, TV와 스피커 등 각종 음향(영상) 제품에 새겨진 것을 보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돌비의 첨단 음향 기술 접목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인증 마크로 보면 틀림없다.
1933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레이 돌비는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 재학 중 전자기기 제조사 암펙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1956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테이프 녹음기 ‘암펙스 VRX-1000’을 만들어내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65년 돌비 래버러토리스(Dolby Laboratories·이하 돌비)를 설립해 잡음 억제(noise reduction)와 입체음향 시스템의 표준 규격을 만들었다. 이는 ‘돌비 시스템’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음악 및 영화 산업 등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1976년에는 극장용 음향 시스템 ‘돌비 스테레오’를 선보여 영화 산업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앞서 언급한 10개의 아카데미상과 14개의 에미상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해 주어진 것이다. '할리우드의 히든 챔피언’이라고 부를만하다. 레이 돌비가 타계했을 때 ‘스타워즈’ 시리즈 감독이자 제작자인 조지 루카스는 “그는 놀라운 기술적 이해력과 음향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훌륭한 과학자였다. 내가 항상 꿈꿨던 진정한 음향 경험을 ‘스타워즈’에서 구현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성공비결 1│ '신의 한 수'가 된 라이선싱 모델
‘돌비가 헤드폰이나 스피커를 직접 만들면 얼마나 잘 만들까?’
기자가 돌비 애트모스로 구현한 음악을 처음 접하고 든 생각이었다. 돌비에도 그런 고민의 순간이 있었다. 잡음 억제 기술로 주목받기 시작한 초기의 일이다. 돌비는 1966년 ‘돌비 A-타입’이라는 전문가용 잡음 억제 기술을 세상에 선보이며 오디오 테이프 음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2년 뒤에는 향후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던 가정용 음향 기기 시장 접목을 염두에 두고 처리 과정을 간단하게 한(그래서 훨씬 저렴한) ‘돌비 B-타입’ 시스템을 선보였다. A-타입 시스템을 접목한 기기는 돌비 본사에서 직접 제조했지만, B-타입 기기는 라이선스 방식으로 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국 하만 카돈, 네덜란드 필립스, 일본 나카미치 등 세계 주요 오디오 업체에서 돌비 B-타입 기술이 적용된 카세트 데크를 출시했고, 이들 제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돌비 역시 급성장할 수 있었다. 제조는 전문 제조사에 맡기고, 대신 기술 개발에 집중하면서 돌비는 업계의 기술 표준을 설정하는 역할을 하게 됐고, 지식재산(IP) 라이선싱을 통해 꾸준한 현금 흐름을 창출할 수 있었다. 돌비의 음향 기술을 기기에 접목하려면, 부품 설계부터 달라야 한다. 따라서 반도체 등 부품 관련 업체와 음향 기기 업체 양쪽에서 이중으로 수입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비결 2│ 경쟁 대신 생태계와 동반 성장
애플과 메르세데스-벤츠, 넷플릭스의 공통점은 뭘까. 각각 정보통신기술(ICT), 완성차,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분야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기도 하지만, 돌비와 협력 관계에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라이선싱 모델로 수익 기반 확보에 자신감을 얻은 돌비는 첨단 영상·음향 기술을 앞세워 거침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왔다. 경쟁보다는 제휴와 협업을 통해 첨단 음향 기술이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서 생태계를 확장해 왔다. 영화 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돌비는 1970년대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음향이 형편없다고 지적하면서 영화 산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특정 영화사의 손을 잡는 대신 루카스와 스탠리 큐브릭 등 거장과 협업을 통해 산업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탄생한 ‘스타워즈’ 등 일련의 블록버스터 영화의 대성공에 힘입어 돌비의 음향 기술은 할리우드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성공비결 3│ 업의 본질에 충실한 인그리디언트 브랜딩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최상의 몰입 경험 제공’이라는 돌비의 목표는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 음향에 집중했던 돌비가 돌비 비전 기술을 앞세워 영상 분야로 영역을 확장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변화로 볼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청각 콘텐츠 소비자가 몰입을 경험하는 장소는 극장과 집에서 승용차 안, 휴대용 스마트 기기 등으로 점차 넓어졌다. 돌비 파트너십도 그런 변화에 발맞춰 범위를 넓혀 왔다. 2024년 6월에는 국내 완성차 브랜드 중 최초로 현대자동차그룹의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가 돌비 애트모스를 탑재했다. 돌비는 또한 넷플릭스, 디즈니+, 애플TV+ 등 국내외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돌비 비전과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한다. 게임 업계에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5(PS5)는 돌비 애트모스를, 엑스박스 시리즈 X|S는 돌비 비전을 지원한다. 지난해 빌보드 ‘2024 올해의 톱 100 아티스트(2024 Year End Top 100 Artists)’ 에 선정된 아티스트 중 93%가 돌비 애트모스로 앨범을 발매했을 만큼 대중음악 분야에서 영향력도 압도적이다. 돌비의 이 같은 전략을 경영학계에서는 ‘인그리디언트 브랜딩(ingredient branding)’의 사례로 보기도 한다. 최종 제품이 아닌 부품이나 소재 등 구성 요소(ingredient)를 널리 알리고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기법이다. 과거 ‘인텔 인사이드’ 스티커만으로 PC 제품의 신뢰도까지 드높였던 인텔이나 미국 원단 제조 기업인 W.L. 고어 앤드 어소시에이츠의 원단 ‘고어텍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성공비결 4│ 끊임없는 기술혁신
고어텍스와 과거 인텔의 사례에서 보듯 인그리디언트 브랜딩은 독보적인 기술력이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다. 애플과 메르세데스-벤츠, 소니 등 굵직한 글로벌 기업을 파트너로 거느릴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기술력 덕분이다. 돌비의 2024년 연간 매출은 12억7400만달러(약 1조7700만원)다. 이름값에 비해 크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돌비가 직원 약 2000명 정도인 ‘강소 기업’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넷플릭스 직원 수는 약 1만4000명이다. 돌비는 같은 해 연구개발(R&D) 비용으로 매출의 20%가 조금 넘는 2억6400만달러(약 3670억원)를 지출했다. 지난 60년 동안 기술 투자로 돌비는 2025년 6월 기준, 총 1만2564건의 특허를 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