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골프는 1995년생 고진영(30), 김효주(30) 이후 뚜렷한 세대교체에 실패했다. 세리 키즈가 세계를 호령하던 전성기가 지나간 뒤에도 강세는 유지됐지만, 새로운 스타의 등장은 더뎠다. 최근 2년간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투어에서 류해란(24)이 꾸준히 상위권에 오르며 분투하고 있지만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평가다. 반면 일본은 철저한 세대교체로 무장한 신예들이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
올 시즌 LPGA 신인상 랭킹 상위 네 자리는 일본 선수 몫이었다. 다케다 리오(22), 야마시타 미유(24), 쌍둥이 자매 이와이 지사토·아키에(23)가 나란히 1승씩을 거두며 돌풍을 일으켰다. 승수는 한국이 5승으로 일본(4승)을 앞서지만, 일본은 메이저 대회 2승을 포함했다. 최근 AIG 여자 오픈에서는 톱 5에 세 명이 이름을 올리며 ‘질적 우위’를 보여줬다. 한국은 최근 3시즌 동안 양희영이 2024년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거둔 1승이 전부다. 일본은 ‘황금 세대(1998년생)’ ‘플래티넘 세대(2000년생)’ ‘다이아몬드 세대(2003년생)’로 이어지는 계보를 세운 반면, 한국은 세대교체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골프의 새로운 희망으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이름이 바로 김민솔(19)이다.
김민솔은 17세이던 2023년 세계 아마추어 팀선수권에서 한국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78㎝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타, 정교한 아이언샷, 안정된 퍼팅을 겸비한 그는 아마추어 세계 랭킹 2위까지 올랐다. ‘한국 여자 골프의 미래’ 라는 타이틀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프로 무대의 현실은 달랐다. 만 18세이던 지난해 프로로 전향했지만, 한국 여자 프로골프(KLPGA)투어 시드 순위전에서83위에 머물며 정규 투어 입성에 실패했다. 드림투어에서는 80타를 치며 100위권까지 밀려났다. 순탄하게 성장해 온 그에게는 처음 찾아온 시련이었다.
“골프를 시작하고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해 왔는데, 작년에 처음 골프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부모님이 ‘네가 큰 선수가 되려면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위로해 준 게 큰 힘이 됐다.”
올해 초 두산건설 위브챔피언십 1라운드 기자회견에서 김민솔은 “골프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언론은 이를 ‘나는 누구인가, 골프는 무엇인가’를 묻는 성찰로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벽 앞에서 흔들리던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의 뒤에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코치를 지낸 오세욱 두산건설 상무는 3년 전 그의 경기를 보고 ‘재목’임을 직감했다. 이후 두산건설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후원을 이어 왔고, 이는 큰 울타리가 됐다. 오 상무는 “묵묵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선수”라면서도 “프로에서 대성하려면 ‘고구마 같은 답답함’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골프는 자연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경기다. 기계적인 스윙만으로는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없다”며 몸의 움직임, 지면 반력 등 기본 원리에 대해 자주 대화했다고 전했다. 그는 뉴질랜드 교포 출신으로, 2002년 매경오픈에서 우승했던 에디 리(한국 이름 이승용) 코치를 연결해 주기도 했다. 김민솔은 뉴질랜드 동계 훈련에서 막막한 마음에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결국 한 단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내가 골프를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 스윙 개념부터 다시 배우며 골프를 깊이 이해하게 됐다.” 김민솔은 기계적이라는 평가를 벗고 도전적이고 움직임을 이해하는 골프로 변화를 모색했다.
2 김민솔의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경기 장면. /사진 KLPGA
좌절은 반전의 계기가 됐다. 김민솔은 올해 드림투어에서만 4승을 거두며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자신을 다잡으며 단단해졌다. 그리고 8월 24일 마침내 정규 투어 무대인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에서 마지막 3홀에서 4타를 줄이는 대역전극으로 첫 우승을 차지했다. 마지막 홀에서 성공시킨 10.5m 이글 퍼트는 좌절을 딛고 다시 날아오른 상징적 장면으로 팬의 기억에 남았다. 이번 우승으로 그는 내년까지 시드를 확보했다.
김민솔은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전지훈련에서 고진영과 룸메이트가 된 경험도 있다. “세계 1위라면 훈련할 때만 열심히 하고 쉴 줄 알았는데, 하루를 관리하는 태도가 달랐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스트레칭, 코어 운동, 빈 스윙을 매일 1시간씩 하더라. ‘이래서 세계 1위가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는 선배의 장점을 조합한 최고의 선수를 꿈꾼다. 박인비(37)에게서는 포커페이스와 퍼팅, 고진영에게서는 승부사 마인드, 김효주(30)에게서는 자유로운 천재성, 리디아 고(28)에게서는 정교한 쇼트게임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매니지먼트사 와우(WOW)스포츠의 이수정 상무는 “제2의 박인비를 찾았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골프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성실한 훈련 자세가 어린 시절 박인비를 똑 닮았다”는 것이다. 이 상무는 “단순히 장타와 체격 때문이 아니라, 그 태도에서 위대한 선수가 될 가능성을 본다”고 강조했다.
LPGA투어 우승 경험이 있는 임성아(41) 프로도 김민솔을 높게 평가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김민솔은 모든 조건에서 LPGA 무대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조언했다. 임성아는 2006년 LPGA 플로리다스 내추럴 채러티 챔피언십에서 최종 합계 16언더파 272타로 우승하며 LPGA의 19번째 한국인 챔피언이 됐다. 당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 크리스티 커(미국), 카리 웹(호주) 등 쟁쟁한 스타를 제치고 거둔 값진 승리였다. 현재는 두산건설에서 골프 마케팅을 담당하며 후배에게 경험을 전하고 있다.
김민솔은 이어 참가한 KLPGA 메이저대회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서도 안정된 플레이로 공동 6위를 기록했다. 그는 “샷 정확도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앞으로는 단순히 스윙을 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진짜 골프를 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라고 했다.
김민솔은 예전엔 라운드가 갈수록 무너져 ‘뒷심 부족’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첫 우승 때 마지막 3홀에서 4타를 줄이며 역전한 뒤 달라졌다. 보기 후 곧바로 버디로 만회하고 막판 스퍼트에 강한 선수가 됐다.
‘자이언트 베이비’ 김민솔은 지난해의 좌절을 통해 더욱 단단한 선수로 성장했다. 한국 여자 골프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그의 성장 스토리에 팬의 기대와 관심이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