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홈술 문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늘던 와인 소비가 최근 몇 년 다소 주춤하지만, 화이트 와인의 인기는 여전히 강세다. 그 중심에는 뉴질랜드산 소비뇽 블랑이 있다. 특히 남섬의 말보로(Marlborough)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비뇽 블랑은 싱그러운 허브 향, 상큼한 산미, 풍부한 과일 향으로 전 세계 애호가를 매혹시키며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뉴질랜드 와인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청정한 자연에서 친환경으로 재배된 포도는 와인에 순수함을 불어넣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두 개의 섬은 지역마다 기후와 토양이 달라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다가오는 추석, 익숙한 말보로를 넘어 북섬의 호크스 베이(Hawke’s Bay)와 마틴버러(Martinborough)에서 또 다른 매력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명절 음식과 멋진 궁합을 보여줄 와인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힘 있는 호크스 베이, 우아한 마틴버러
호크스 베이는 말보로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와인 산지다. 19세기 중반 선교사가 처음 포도나무를 심으며 와인 역사가 시작된 이곳은 연중 기후가 온화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달콤함과 신선함을 모두 갖춘 포도가 자라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호크스 베이에서도 김블렛 그래블스(Gimblett Gravels)는 특히 주목받는다. 이곳의 테루아(terroir·포도 재배 환경)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토양에 가득한 자갈이다. 한여름 뜨거운 햇살을 흡수한 자갈은 서늘한 밤이면 온돌처럼 포도에 온기를 전달해 열매의 완숙도를 높이고, 물 빠짐이 뛰어나 농축된 풍미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김블렛 그래블스는 ‘뉴질랜드의 보르도’ 라고도 불리며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시라를 중심으로 강건한 레드 와인과 풍성한 샤르도네를 생산하는 프리미엄 산지로 자리 잡았다.
호크스 베이가 힘과 구조감을 표현한다면, 북섬 남단의 작은 마을 마틴버러는 섬세함과 우아함의 대명사다.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마틴버러가 피노 누아와 소비뇽 블랑의 명산지로 꼽히게 된 데는 이곳의 기후와 토양이 한몫한다. 여름의 큰 일교차가 포도를 천천히 완숙시키면서 풍미와 산미의 균형을 완벽하게 잡아주고, 점토와 돌이 섞인 토양은 아로마에 농밀함과 정교함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마틴버러의 소비뇽 블랑은 말보로의 강렬한 허브 향 대신 조화롭고 세련된 풍미를 뽐내고, 피노 누아는 복합적인 아로마와 섬세한 질감으로 특유의 매력을 발산한다.
추석 밥상과 완벽한 궁합, 크레기 레인지
호크스 베이와 마틴버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와이너리가 크레기 레인지(Craggy Range)다. 1998년 피보디(Pea-body) 가족이 설립한 이 와이너리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 프리미엄 와인의 상징이 됐다.
그 성공의 바탕에는 남다른 와인 철학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땅의 정체성을 오롯이 보여주며 세대를 넘어 계승될 와인을 목표로 했다. 그런 와인을 생산할 땅을 찾아 오랜 기간 미국, 유럽, 호주 등을 탐색하다 마침내 김블렛 그래블스에서 이들은 바라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테루아를 만났다.
김블렛 그래블스에서 생산한 와인은 크레기 레인지의 명성을 단숨에 세계에 알렸다. 특히 시라는 뉴질랜드 레드 와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15개월간 프랑스산 오크 바리크(barrique·225L의 작은 통)에서 숙성을 거친 이 와인은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부드럽고 매끈한 타닌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블루베리, 블랙베리, 자두, 체리 등 풍성한 과일 향이 여운까지 길게 이어진다.
샤르도네도 남다른 개성을 자랑한다. 레몬, 자몽, 복숭아 등 싱싱한 과일 향에 버터, 크림, 견과 같은 아로마가 고소함을 더하고, 짭짤한 미네랄리티와 산뜻한 산미가 와인에 경쾌함을 불어넣는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했다면 부르고뉴산 프리미엄 샤르도네로 착각했을 정도로 우수한 품질이다. 다가오는 추석에 명절 음식과 즐긴다면 시라에는 갈비찜을, 샤르도네에는 산적이나 빈대떡을 추천한다. 시라의 달콤한 풍미와 샤르도네의 산뜻함이 음식의 맛을 끌어올려 기대 이상의 마리아주(marriage·음식과 와인의 조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크레기 레인지는 또 다른 테루아의 가능성을 좇아 마틴버러로 산지를 확장하고 테 무나 로드(Te Muna Road) 포도밭을 건설했다. 기후가 서늘하고 오래된 하천의 퇴적 토양을 갖춘 이 밭은 우아한 피노 누아와 섬세한 소비뇽 블랑을 생산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는 프랑스산 오크 바리크에서 11개월간 숙성을 거쳐 크랜베리, 딸기, 라즈베리 등 갖가지 베리 향이 신선하고 후추, 돌, 철 같은 복합미가 정교함을 더한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와인이며 육전이나 버섯전 또는 찜닭과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테 무나 로드 소비뇽 블랑은 수밀도, 레몬, 라임 등 싱그러운 과일 향과 은은한 허브 향의 세련된 조화가 입맛을 사로잡는다. 세계적인 와인 매체인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작년에 이 와인을 세계 100대 와인 중 11위에 올려 품질을 인정했고, 덕분에 2023 빈티지는 단숨에 품절 사태를 빚기도 했다.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리지만 나물, 부추전, 생선구이와 특히 궁합이 잘 맞는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가족의 웃음소리에 와인의 향이 더해지면 그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추억이 된다. 이번 추석에는 청정한 자연이 빚은 와인으로 마음을 나누는 자리를 풍요롭게 채워보는 것은 어떨까. 한가위 달빛처럼 환하고 고운 뉴질랜드 와인이 추석 밥상에 향긋한 빛을 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