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애플은 집중적인 기술 훈련과 막대한 투자를 통해 중국의 생산 역량을 직접 키워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정점으로 치닫던 지난 5월, 중국의 기술 굴기를 이끈 주체가 다름 아닌 미국의 테크 기업 애플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 애플 전담 기자 패트릭 맥기(Patrick McGee)의 신간 ‘애플 인 차이나(Apple in China)’다. 그는 5년에 걸쳐 200명이 넘는 임직원을 인터뷰하고, 스티브 잡스의 육성이 담긴 비공개 회의록과 내부 자료를 분석해 애플과 중국의 공생 관계를 추적했다. 그의 결론은 하나였다. “중국이 애플을 키운 것이 아니라, 애플이 중국을 키웠다.” 애플은 높은 마진율과 효율성에 이끌려 중국 현지의 기술력과 제조 생태계를 직접 육성했고, 그 과정에서 ‘세계의 공장’이던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기술 패권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지난 9월 한국어 번역본 출간을 계기로 맥기 기자와 인터뷰했다. 그에게 미국 기업 애플이 어떻게 중국의 첨단 기술 발전을 이끌게됐는지 그리고 한국이 여기서 얻을 교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애플은 어쩌다 중국을 기술 강국의 길로 이끌었나.
“애플이 중국에 의존하게 된 것은 단순 경제 논리의 산물이라기보다 시대적 맹점의 결과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애플은 지금처럼 거대한 기업이 아니었다. 중국 또한 위협으로 인식되지도, 주요 경제권으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당시 서구 기업은 저비용 생산으로 이익을 얻었고, 중국은 빈곤을 완화하며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학습했다. 서구의 지배적 신념은 ‘무역이 국경을 넘지 않으면, 군대가 넘는다’는 격언에 담겨 있었다. 경제 교류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고 냉전을 승리로 이끈다는 모델이었다. 중국이 기존 국제 질서에 편입될 것이라는 기대도 컸다.”
언제부터 애플의 중국 의존이 리스크로 바뀌게 됐나.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은 더 이상 미국과 동맹국이 설계한 세계관 안에 머무를 의지가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돌이켜보면 애플뿐 아니라 주주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자본주의 전체가 지정학적 맹점을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애플은 이미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비용, 품질 그리고 무엇보다 ‘규모의 경제’ 측면에서 중국이 제공하던 조건을 대체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도 이럴 줄 몰랐던 걸까.
“미국 정부는 애플이 중국에서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본다. 서구 기업이 중국에서 제품을 생산한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애플이 단순히 중국의 기술력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길러낸다’는 점이 간과된 것이다. 그사이 애플은 수년간 집중적인 기술 훈련과 막대한 투자를 통해 현지 생산 역량을 직접 키워왔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애플에 생산기지 복귀를 압박하는 것 같은데.
“애플이 복귀하더라도 미국이 자체적으로 필요한 인력과 설비를 갖추는 데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설령 이를 실현하더라도 미국이 중국과 같은 수준의 비용 경쟁력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애플은 미국 내 생산 확대를 위해 4년간 6000억달러(약 856조원)를 투자하겠다는계획을 발표하지 않았나.
“허구에 가까운 계획이다. 6000억달러라는 수치 산정 방식도 불투명하다. 내 추정으로는 매년 1000억달러(약 143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금을 미국 내 ‘투자’에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 언론이 자주 인용하는 협력사 ‘코닝’에 대한 25억달러(약 3조5000억원) 투자도 6000억달러의 약 0.4%에 불과하다. 결국 ‘보여주기’인 셈이다. 정말 애플이 미국에 수천억달러를 투입했다면 미국 곳곳에 첨단 공장이나 산업 클러스터가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책에서 애플 공급망이 중국 기업 성장의 발판이 돼 한국 기업을 위협하게 됐다는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사실인가.
“사실 애플의 초창기 파트너십에는 한국 기업이 깊이 관여했다. 1990년대 말 첫 아이맥(iMac) 생산을 맡았던 곳이 바로 경북 구미의 LG전자 공장이었다. LG전자는 영국 웨일스와 멕시코에서도 애플 제품을 조립했지만, 이후 폭스콘이 물량을 따내면서 애플과 협력 관계가 끊겼다. 이 사례는 중국에 투자한 기업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한국 대기업 경영진과 창업가로부터 ‘중국 진출 5년 만에 기술이 복제돼 시장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애플의 경험은 이런 구조적 위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애플은 왜 대체되지 않았나.
“지속적인 혁신과 자체 운영체제(OS) ‘iOS’ 라는 진입 장벽 때문이다. 샤오미나 화웨이가 애플의 공급망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지만, iOS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애플은 OS를 직접 소유하고 있어 안드로이드 기반의 삼성 등 다른 제조사보다 제품의 차별성이 훨씬 크다. 결과적으로 애플이 중국 공급망을 성장시켰지만, 타격받은 쪽은 애플이 아니라 안드로이드 진영, 특히 삼성이었다.”
최근 인도와 베트남 등이 새로운 생산 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애플이 이들 국가로 생산시설을 이전할 가능성은.
“베트남은 숙련된 인력을 갖췄지만, 규모 면에서 중국과 비교하기 어렵다. 인도의 경우 토지·인구·비용 조건이 비슷하지만, 정부의 집행력과 인프라 수준에서 큰 차이가 있다. 또 고속철도·항만 등 기반 시설도 부족해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 즉, 이들 국가는 아직 중국의 상대가 안 된다.”
그럼에도 애플이 인도 생산 비중을 늘리려는 이유는.
“관세 혜택과 정부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어서다. 물론 효율성과 품질은 떨어진다. 실제로 2017년 첫 ‘메이드 인 인디아’ 아이폰이 생산된 이후의 성장 속도는 2007~2015년 중국에서 아이폰 출하량이 500만 대에서 2억3000만 대로 급증하던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느리다. 지금도 인도는 아이폰 조립의 마지막 단계만 담당하고, 설계부터 검수까지 전 과정을 맡는 건 여전히 중국이다.”
한때 애플은 중국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였지만, 올해 2분기 5위까지 밀려났다. 여기에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애플의 위기인가.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하는 연말에는 중국 내 점유율이 오르지만, 이후 중국 스마트폰 브랜드가 잇따라 신제품을 내놓으면 다시 하락하는 흐름이 반복돼 왔다. 그래서 3~6월엔 애플 점유율 하락 기사, 9~12월엔 애플 점유율 반등 기사가 나오는 것이다. 다만 이번엔 양상이 다를 수 있다. AI 부진과 오포·비보·샤오미·화웨이의 거센 공세를 고려하면, 2028년쯤 애플의 점유율은 한 자릿수로 떨어질 수 있다. 특히 위챗이 사실상 ‘준(準)OS’로 작동하는 중국 시장에서는 현지 브랜드의 가격 경쟁력이 훨씬 두드러진다.”
애플이 이런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은.
“전혀 없진 않다. 문제는 이것이 바이두나 알리바바 같은 중국 기업과 AI 공동 개발을 기반으로 한다면, 미국 정부와 새로운 정치적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10년 뒤 애플이 어디에 있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현재 흐름만 놓고 보면, 생산 면에서는 중국 의존도가 더 커지고, 시장점유율은 오히려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애플이 마주할 가장 큰 리스크는.
“중국의 대만 무력 통일 위협이다. 이는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현실적 리스크다. 여기에 미·중 협상 결렬이나 이스라엘·이란, 우크라이나·러시아 같은 대리전 격화도 변수다. 놀라운 점은 애플이 여전히 대안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플랜 B’가 없다는 뜻이다. 생산은 중국에, 핵심 칩은 대만에 묶여 있다. 이런 구조적 종속이 애플을 진짜 위험에 빠뜨리는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