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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와 수출 통제 그리고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하면서 글로벌 기술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그 속에서 소버린 AI(Sovereign AI·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AI), 즉 주권형 인공지능(AI)이라는 개념이 각국 정부와 기업의 핵심 전략으로 떠올랐다.

정부가 단순히 자국 AI 기술을 발전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자국 데이터와 인프라를 기반으로 해외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 규제와 가치에 맞는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다. 정보기술(IT)은 혁신의 수단을 넘어 국가 안보와 전략적 영향력의 무기가 되고 있으며, 정부가 직접 인재·자본·지식재산의 흐름을 통제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기업 경영진 관점에서 당장 눈앞에 놓인 과제는 두 가지다. 단기적으로는 관세와 수출 통제가 IT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이다. 특정 부품이나 장비 이동이 막히면 생산 차질과 비용 상승은 불가피하다. 공급망을 지역별로 세분화하고, 핵심 시장에 안정적인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는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소버린 AI 확산이 비즈니스 모델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문제다. 각국이 자국 데이터와 규제 환경에 맞춘 AI 시스템을 추진하면, 글로벌 기업은 동일한 제품과 서비스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별로 다른 데이터 사용 규칙과 인프라 요구에 맞춰 기술 아키텍처를 다시 설계해야 하고, 이는 비용 구조와 사업 운영 전반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데이터와 인프라 그리고 AI 모델의 국산화 경쟁

소버린 AI는 자국에서 문화적으로 적합한 데이터를 활용하고, 자국이나 지역이 통제하는 데이터센터에서 운영되며, 오픈 소스 기반 모델을 통해 투명성과 검증 가능성을 확보하는 AI를 의미한다. 개인정보 보호를 넘어 국가의 규제 기준과 전략 목표에 맞춰 결과를 산출하고, 핵심 기술을 외국이 지렛대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의존도를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

예컨대 유럽연합(EU)은 지난 2월 2000억유로(약 331조6460억원) 규모의 ‘인베스트 AI’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 가운데 200억유로(약 33조1646억원)를 그래픽처리장치(GPU) 10만 개 이상을 장착한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에 배정했다. 독일 도이치텔레콤은 엔비디아와 협력해 유럽 제조업 전용 산업 AI 클라우드를 준비 중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휴메인이라는 신생 AI 기업을 통해 500㎿(메가와트) 규모의 데이터센터 건설과 초거대 아랍어 모델 개발에 나섰다. 첫 단계로 50㎿ 데이터센터에 엔비디아 GPU 1만8000개를 도입해 2026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각국이 추구하는 목표는 다르다. 중국은 데이터와 모델, 인프라를 모두 통제하는 완결성을 추구한다. 유럽연합(EU)은 규제 준수와 데이터 주권을 중시하며, 중동은 글로벌 생태계와 연계를 확대하는 전략을 택했다. 현실적으로 완전한 독립은 불가능하지만, AI는 국가·지역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제품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콘텐츠 검열 기준, 데이터 라벨링 방식, 허용되는 활용 범위가 국가마다 달라 단일한 글로벌 표준은 형성되기 어렵다. 따라서 동일한 AI 업무 흐름조차 각 시장에 맞춰 모델과 데이터, 인프라를 새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일상이 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미국은 첨단 GPU와 대규모 파운데이션 모델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 기술 의존을 최소화한 자체 모델과 반도체로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발 거대 언어 모델(LLM)과 화웨이가 개발한 칩은 미국 기술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개발된 대안으로 꼽힌다. 중국은 여기에 더해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같은 물리적 AI 영역에도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신문섭
베인앤드컴퍼니
대표파트너
신문섭 베인앤드컴퍼니 대표파트너

반도체 전쟁이 불붙인 IT 탈세계화

소버린 AI가 주요국 정부의 핵심 의제로 급부상한 주된 배경은 미·중 무역 전쟁이다. 미국은 2018년 이후 첨단 칩과 반도체 제조 장비, 전자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 HBM(고대역폭 메모리) 등 핵심 기술을 대상으로 대(對)중국 수출 통제를 단계적으로 강화했다.

최근 들어서는 특정 품목뿐만 아니라 더 넓은 범위의 제품과 국가를 포괄하는 관세정책까지 추진되면서, 글로벌 IT 산업 가치 사슬 전체가 충격받고 있다. 단순히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이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국면이 도래한 것이다.

미·중 갈등 초기에는 ‘차이나 플러스 원’ 전략이 유효했다. 다국적기업은 생산 거점을 멕시코, 베트남, 인도 등으로 분산해 중국 리스크를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생산 이전만으로는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현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특정 지역에서 지정학적 충격이나 자연재해, 혹은 예상치 못한 규제 강화가 공급망 전체를 다시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글로벌 IT 제조 업체는 ‘공장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글로벌 공급망 복원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됐다. 공급망을 지역 단위로 잘게 쪼개고, 각 주요 시장에서 직접투자와 고용을 결합하는 현지화 전략을 강화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불확실성 시대의 네 가지 실행 원칙

이러한 변화는 일시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새로운 흐름이자 국제 질서라는 것이 전문가의 공통된 진단이다. 테크 기업은 단일한 글로벌 제품으로 모든 시장을 서비스하는 방식을 고집할 수 없게 됐다. 각국의 규제와 데이터 활용 관행, 인프라 요건을 반영한 병렬적 운영 모델을 설계해야 한다. 이를 위한 기본 원칙은 네 가지다.

첫째, 제품 단위가 아니라 사업 운영 모델 단위로 사고해야 한다. 국가별 정책과 규제가 요구하는 인프라와 데이터 파이프라인,재학습 체계를 갖춰야 한다. 둘째, 글로벌 기술 경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중국의 투자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며, 생성 AI(Genera-tive AI)와 휴머노이드 같은 분야는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크다. 셋째, 생산지를 옮기는 것만으로는 글로벌 공급망 회복력을 확보할 수 없다. 반도체처럼 전략성이 높은 분야는 현지 생산과 투자, 고용을 결합해야 한다. 넷째, 불확실성이 큰 시장에서는 중립 지역 허브를 활용하거나 진입 시기를 늦추는 방식으로 선택지를 열어두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중동의 두바이는 이러한 중립 거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AI와 반도체 기술은 이제 단순한 혁신의 촉매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경제 전략의 중심축이 됐다. 소버린 AI 경쟁과 반도체를 비롯한기술 공급망의 지역화는 앞으로 IT 산업 질서를 규정할 중요한 변수다. 소버린 AI 경쟁은 국내에서 핵심적인 기술 분야의 사업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글로벌 기술 동맹을 통한 해외시장 진출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한국 기업은 기술 공급망 지역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함과 동시에 글로벌 사업 운영 모델의 최적화를 빠르게 진행해야 한다. 확신 있는 영역에는 속도를 높이고, 불확실성이 큰 영역에는 유연성을 배치하는 이중 전략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가 기업 성패를 가를 것이다. 포스트 글로벌 시대에 진정한 경쟁력은 제품을 넘어 선택지에 맞는 사업 운영 모델을 설계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신문섭 베인앤드컴퍼니 대표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