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열 술도가 대표 - 협성대 광고홍보학, 전 JW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헤드 바텐더, 2015 국제코리안컵 칵테일대회 대상 /사진 술도가
김태열 술도가 대표 - 협성대 광고홍보학, 전 JW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헤드 바텐더, 2015 국제코리안컵 칵테일대회 대상 /사진 술도가

영국에서는 퇴근한 직장인이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펍(Pub)’ 문화로 불릴 만큼 영국 특유의 모습이다. 이러한 문화를 바탕으로 에일과 스타우트 같은 다양한 맥주가 영국에서 탄생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런던 프라이드 등의 브랜드가 만들어졌다. 아일랜드 흑맥주 기네스도 지금은 영국 브랜드다. 이처럼 뿌리 깊은 술 문화가 있는 영국에서 한국 술로 승부를 거는 곳이 있다. 5성급 호텔 바텐더 출신인 김태열(36) 대표가 2024년 런던 남부 사우스워크에 문을 연 ‘술도가(Sooldoga)’다. 

이름 그대로 ‘술을 빚는 집’을 뜻하는 술도 가는 쌀, 누룩, 물을 이용해 한국 전통 방식으로 막걸리를 빚는다. 여기에 막걸리가 낯선 영국인을 위해 옥수수, 고구마, 복숭아 등을 더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최근 김 대표를 인터뷰했다.

바텐더 대회 우승자가 막걸리 빚은 이유

술도가는 10년 넘게 칵테일을 다뤄온 김 대표가 한국 술에 대한 애정을 담아 세운 양조장이다. 그는 2008년 바텐더로 활동을 시작해 2015년 제10회 국제코리안컵 칵테일 대회에서 우승한 실력자다.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만찬에서는 한국 전통주를 활용한 칵테일을 선보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유럽 특유의 주류 서비스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유럽에서 주류는 단순히 맛을 평가하거나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넘어, 함께하는 순간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였다” 며 “이 가치를 깊이 깨닫게 되면서 커리어에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당시 JW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 바(Bar)에서 헤드 바텐더로 일하던 그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를 내려놓고 홍콩, 베이징, 벨기에 등을 돌며 우리 술을 활용한 칵테일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또 대만 등 일부 국가에서는 막걸리 빚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여러 나라 술 문화를 경험한 그는 세계 주류 시장의 중심이 영국이라 판단, 2019년 영국에 정착했다.

그는 전주이강주 영국지사장을 맡는 등 한국 전통주 수입사를 창업하며 영국 주류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맥주와 와인 소비문화가 뿌리 깊은 영국에서 전통주를 알리기 위해 힘쓰던 김 대표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고, 2020년 ‘오감 타파스바’를 열어 한국 음식을 타파스 형식으로 제공하며 전통주 페어링을 선보였다. 코로 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전 세계를 강타하며 레스토랑 운영에도 타격이 있었지만, 김 대표에게 팬데믹은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됐다.

당시 그는 2013년부터 공부해 온 막걸리 양조에 도전했다. 김 대표는 “팬데믹으로 직접 빚은 막걸리를 대중에게 판매할 수 없게 되자, 기존 손님과 지인에게 마스크를 쓰고 무료로 나눠줬다”며 “예상치 못하게 막걸리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사업이 위축된 팬데믹 시기에 오히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영국 내 막걸리 라이선스와 관련 절차를 본격적으로 진행했고 술도가와 함께 막걸리 전문 레스토랑 ‘감나무집’을 열었다.

작은 컨테이너에서 시작한 술도가는 현재 매달 2000병이 넘는 술을 런던 전역에서 판매하고 있다. 술도가는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는 물론, 상위 라인인 파머스(탁주), 황금판(청주) 등도 생산하고 있다. 9월 13일(현지시각)에는 망고를 넣은 막걸리 ‘망골리’를 새롭게 선보였다. 김 대표는 “상위 라인 제품을 런던 만다린 오리엔탈 메이페어 바에도 납품하는 등 전통주의 가능성을 세계 무대에서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1 김태열 술도가 대표가 런던에서 운영 중인 ‘오감 타파스바’. 한국 음식을 타파스 형식으로 제공하며 전통주 페어링을 선보인다. 2 술도가에서 빚는 막걸리 제품들. /사진 술도가
1 김태열 술도가 대표가 런던에서 운영 중인 ‘오감 타파스바’. 한국 음식을 타파스 형식으로 제공하며 전통주 페어링을 선보인다. 2 술도가에서 빚는 막걸리 제품들. /사진 술도가

술도가, 양조장 넘어 복합 문화 공간으로

개방된 양조장을 지향하는 술도가는 방문객이 한국 전통 방식으로 직접 술을 빚고 숙성할 수 있도록 정규 과정을 운용하고 있다. 이 클래스는 기수제로 진행된다. 졸업생은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서로 교류하고, 한국 술 문화를 함께 탐구하는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다고 김 대표는 전했다. 그는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고 문화를 나누는 ‘매개체’”라고 말했다.

술도가는 현지인이 한국 전통주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막걸리 클래스뿐 아니라 전통주 시음 클래스, 칵테일 메이킹 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용 중이다. 김 대표는 막걸리가 왜 탁한지, 한국 전통주와 사케의 차이는 무엇인지 같은 궁금증은 양조장에서 직접 술을 맛보며 경험해야만 풀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현지인이 한국 술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프라이빗 파티룸도 제공하고 있다. 술도가가 일종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쌓이면서 술도가는 입소문을 타고 현지인의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았다. 김 대표는 “한국식으로 운영하는 여느 식음료 업장처럼 처음에는 한국인이 주로 방문했다”면서 “완벽주의에 가깝게 한국 전통 방식으로 양조장을 운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매장의 90% 이상이 한국인이 아닌 로컬 현지인으로 채워지게 됐다”고 말했다. 60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영국 남자’ 등 유튜버가 술도가를 소개하면서, 방문객의 국적은영국을 넘어 미국, 남미, 아프리카 등으로 다양해졌다.

한국 술의 홍보 대사를 자처하는 김 대표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외국인이 현지에서 한국 술을 쉽게 구매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는 “초록색 병에 담긴 희석식 소주는 값이 저렴해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지만, 한국 술의 진짜 맛과 가치를 보여주는 전통 방식의 증류 소주나 양조주는 아직 수입업자가 많지 않아 해외에서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영상 제작자와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한국 전통주를 더 자주 소개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현재 술도가는 막걸리 제조에 집중하고 있지만, 김 대표의 최종 목표는 술도가를 유럽 내 한국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한국 전통주 클래스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내년에 런던에서 한국 증류식 소주를 직접 빚을 계획이다. 

김 대표는 “전 세계 어느 바를 가더라도 한국 술을 접하고 한국식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며 “그날이 올 때까지 런던에서 한국 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고 그 성장을 함께 지켜보며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밝혔다. 

김송이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