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의 한 식당에서 만난 유소연(35)은 한층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지난해 셰브론 챔피언십을 끝으로 16년 투어 생활을 마친 그는 말했다. “어릴 때부터 승부의 세계 에서 살았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처음 맞는 평화로운 시기다.” 골프를 떠난 것은 아니다. 은퇴 후 타이틀리스트 앰배서더를 시작으로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 영어 해설, 대한골프협회 경기력향상위원, LPGA 국가 대항전 ‘한화 라이프플러스 인터내셔널 크라운’ 컨설턴트까지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요즘은 어머니와 함께 수영을 배운다. “조금의 틈도 없이 세계를 돌던 선수 시절, 꼭 해보고 싶었던 게 어머니와 ‘같이’하는 일이었다. 진짜 같이하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고 했다. 아침엔 커피를 내리고, 발레·필라테스· 수영으로 몸을 단련한다. “발레는 골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균형, 리듬, 집중력…, 스윙의 본질과 닮았다.”
황유민 이야기로 시작된 점심
대화는 자연스럽게 최근 초청 선수로 참가한 LPGA투어 롯데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황유민(23) 이야기로 흘러갔다.
“반전 매력이 넘친다. 앳된 얼굴, 호리호리한 체격, 귀여운 말투, 하지만 ‘돌격 대장’이란 애칭에서 나오듯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리워드(보상)를 향해 돌진하는 선수다. 박지은, 캐리 웹이 그런 유형이었다. 황유민에게도 그 결단력이 보인다.”
내년 LPGA 진출을 앞둔 황유민에게 필요한 준비를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첫째는 영어다. 잘하든 못하든 ‘이 무대가 내 투어다’라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언어가 통해야 한다. 둘째는 코스 적응력. 한국은 조건이 일정하지만 미국은 대회마다 잔디와 바람이 다르다. 그래서 서두르지 말고 자신이 잘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씩 채워야 한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KLPGA) 때는 이랬는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는 “골프는 결국 자신감의 경기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건 언어와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현역 시절, 대화가 즐거운 선수"
유소연은 ‘대화가 즐거운 선수’로 통했다. 2018년 무렵 그는 조던 스피스의 스승으로 유명한 카메론 맥코믹에게 지도받았다. 세계 1위 스피스를 12세 때부터 길러낸 맥코믹은 기술보다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코치로 알려져 있다.
“모든 선수에게 같은 스윙을 가르치는 코치는 믿지 않는다. 맥코믹은 내 리듬과 생각을 존중해줬다. 감(感)에 의존하던 나에게 일관성과 감각의 균형을 찾게 해줬다.”
그는 “좋은 코치는 선수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미국 진출 선수는 현지에서 스윙을 점검해줄 코치가 꼭 필요하다. 다치면 대일밴드 붙이듯, 볼이 안 맞으면 임기응변으로 넘기다 보면 골프는 금세 미궁으로 빠진다”고 했다.
그는 “기술보다 중요한 건 ‘사고의 일관성’ 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스윙도 흔들린다”고 덧붙였다.
그는 2018년 일본여자오픈에서 하타오카 나사의 대회 3연패를 저지하며 우승했다. 그는 “일본 선수들이 1번 홀에서 코스에 고개 숙여 인사하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오늘 라운드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라고 하더라. 코스에도 예의를 표하는 것이다. 일본은 만물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 정신이 골프에도 녹아 있었다”고 말했다. 리디아 고가 ‘천재 소녀’로 불리던 시절에도 그는 남다른 시각을 보였다.
“리디아는 재능도 탁월하지만, 엄청난 연습량을 봐야 한다. 어린 나이일수록 체력이 좋고 회복이 빠르니까 더 많이 연습할 수 있다. 재능은 시간과 반복이 받쳐줘야 완성된다.” 그는 “꾸준함은 재능의 또 다른 이름”이라며 “연습에 진심인 선수만이 오래 간다”고 했다.
KLPGA투어에서 뛰던 2011년 US여자오픈에서 그는 서희경과 연장 끝에 우승했다. 한국 선수끼리의 명승부 못지않게, 유창한 영어로 한 우승 소감이 화제가 됐다. “그땐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LPGA 진출을 염두에 두고 과외를 받던 중이었다. 선생님이 ‘자신감을 위해 우승 소감을 영어로 연습해보자’ 고 했는데, 정말 우승을 해버렸다. 족집게 과외였다(웃음).” 그는 “그때 느꼈다. 준비는 운보다 강하다”고 회상했다.
'V157'의 총무
유소연은 한국 여자 골프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선수 가운데 한 명이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 개인·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KLPGA 10승, LPGA 6승(메이저 2승), 유럽· 일본투어 각 1승, 기타 3승 등 통산 21승을 거두었다. 한국·미국·일본·캐다다·중국 등 5개국 내셔널 타이틀을 석권했다. 2012년 LPGA 신인상, 2017년 올해의 선수, 같은 해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세계 무대를 주름잡은 1988년생 ‘드래곤 시스터스(용띠 자매)’인 박인비, 신지애, 김하늘, 이보미, 이정은 5인과 함께 만든 계 모임 ‘V157(당시 이들의 승수를 모두 더한 이름)’ 의 총무를 맡고 있다. 이들보다 두 살 어린 유소연은 모임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일정 맞추기 제일 어렵다(웃음). 만나면 다들 10대 시절로 돌아간다.” 와우 매니지먼트의 이수정 상무는 “소연이는 완벽주의자지만 가끔 헛똑똑이 같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즐겁다”고 했다.
그는 LPGA 시절 사귄 친구가 많다. 모건 프레셀(미국), 미야자토 아이(일본), 페르닐라 린드베리(스웨덴) 등은 자주 연락하고 지낸다. “문화가 달라도 마음이 통하면 친구가 된다. 여전히 그들과 인연이 내 골프 인생의 일부로 남아 있다”고 했다.
"KLPGA, 단단한 그린이 필요하다"
그는 “KLPGA가 커지고 상금도 늘었지만, 세계와 간극은 여전히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세계 무대 도전을 꺼리는 분위기는 걱정스럽다. 한국 여자 골프는 “한국 1등은 곧 세계 1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급성장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이 안주하는 사이 미국과 일본, 태국, 유럽 선수들의 경쟁력이 강해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 해 LPGA투어에서 15승을 거두던 한국 여자 골프는 이제 두 자리 승수는 꿈만 같다. 유소연은 “일본 여자 골프는 LPGA투어 신인왕 출신인 고바야시 히로미 회장 취임 이후 10년 이상 개혁을 펼친 끝에 달라졌다”며 “우리는 여전히 경쟁력이 있는 만큼 멀리 보고 차근차근 달라진다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임진희와 이소미처럼 힘든 도전을 선택한 선수에게 따뜻한 후원의 손을 내민 신한금융그룹 같은 스폰서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했다.
국내 대회가 열리는 코스 세팅이 변별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최근 국내 대회에서 우승하는 선수들은 장타력과 퍼팅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아이언 샷이나 그린 주변 쇼트 게임에서는 부족하다는 평이다. 러프는 깊지 않고, 그린은 물러서 샷의 변별력을 정밀하게 테스트할 수 없다. 그럼 아이언 샷의 정확성, 거리 조절력 같은 능력이 사라진다. 유소연은 “가장 빠르게 코스 세팅의 차이를 만들 방법은 그린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쉽지 않은 과제지만 대회 주최 측과 골프장이 뜻을 모으면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한골프협회(KGA) 경기력향상위원을 맡았다. 주니어 시스템 개선에도 참여하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는 “내가 호기심이 많고 친구 사귀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데 골프가 많은 걸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고 했다. “골프는 내 인생의 언어다. 앞으로도 그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