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제지 회사에 근무하는 만수의 평온한 가족 식사 장면으로 막을 연다. 한적한 지방 도시에사는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이뤘다고 자평할 만큼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중년 남성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 한때 아버지의 비극으로 잃었다가 오랜 직장 생활 끝에 되찾은 마당 넓은 집 그리고 ‘올해의 펄프맨 상’ 수상이 증명하듯 직장에서 확고한 인정. 이 모든 것이 만수로 하여금 사회가 요구하는 가장이자, 직장인 역할에 충실히 부응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한다.
만수가 마당에서 가족을 위해 굽는 장어는 회사에서 보내온 선물이다. 그가 준비한 깜짝 선물에 환히 웃는 아내의 얼굴은 만수의 자부심을 한층 더해준다. 그러나 아들이 기다란 장어를 보고 “이거 뱀 아니야?”라고 묻는 장면은 곧 드러날 불길한 진실을 예고한다. 그것은 회사가 정리 해고 대상자에게 보낸 ‘위로용 선물’이었다. 한순간에 직장을 잃은 만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무기력하게 내몰린다. 경제적 불안과 함께, 가까스로 되찾은 낙원 같은 집과 가족까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잠식한다.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불가항력
만수는 자신의 낙원을 지키기 위해 복직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그는 아내가 자기를 떠나 직장 상사이자, 치과 의사인 남자와 관계를 맺을 것이라는 망상에까지 시달린다. 불안과 강박이 뒤섞인 끝에 그는 ‘자리가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서라도 살아남겠다’는 결심에 이른다. 그리고 ‘문제지’에 다니는 선출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유일한 회생의 길이라 믿게 된다. 결국 그는 선출뿐 아니라, 경쟁자라 여긴 범모와 시조까지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성실히 살아온 만수가 맞닥뜨린 위기는 공장 자동화라는 사회 시스템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개인 의지로는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불가항력에 가깝다. 비극은 그가 이 외부 현실을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대신 왜곡된 자기 정당화의 논리로 바꾸는 순간, 시작된다. 관객은 그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그 극단적 선택만은 말리고 싶어진다. 그네를 타는 딸을 바라보는 장면처럼, 공감과 거리 두기를 오가며 그의 추락을 지켜본다.
영화는 만수의 살인뿐 아니라, 어쩔 수 없음에 기대어 벌어지는 일상의 타협을 병치한다. 아내는 가장의 해고로 인한 경제적 압박 때문에 가족이라 여겼던 반려견들을 친정으로 보내는 일종의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만수는 아들이 절도 혐의로 경찰에 불려 갔을 때, 친구가 주도했다고 거짓 진술하도록 종용한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종이 생산을 위해 나무를 베는 장면이 중첩된다.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가족 생계를 위해서는 반려동물을 포기해야 하고, 아들의 전과를 막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가르쳐야 하며, 종이를 생산하려면 자연을 파괴해야 한다.
건축의 환경적 딜레마
환경적 관점에서 건축 역시 본질적으로 피할 수 없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하나의 건물이 세워지는 순간부터 환경의 부담은 필연적으로 커지기 때문이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2024-2025 세계 건축 및 건설 부문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건축 부문은 전 세계 에너지 소비량과 온실가스 배출량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매년 약 20억t의 건설 및 해체 폐기물이 발생하는데, 이는 전 세계 폐기물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건축은 그 자체로 환경에 막대한 부담을 지우는 산업이다.
그럼에도 건축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의 거주와 사회·경제적 활동이 지속하는 한, 건축은 멈출 수 없는 행위처럼 보인다. 실제로 전 세계 건축 총연면적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2022~2023년에만 약 2% 늘어나 2600억㎡를 넘어섰다.
이처럼 모순된 현실에 건축에 요구되는 첫 번째 덕목은 불필요한 건축물을 새로 짓지 않을 용기다. 그리고 ‘꼭 필요한 건축물’을 짓는다면, 자재 선택과 시공, 사용, 해체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지속 가능한 기술과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아직 산업 전반의 보편적 흐름이라기보다 일부 실천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건축 환경 문제에 대한 공감과 자성 인식은 점차 확산하고 있고, 그 위에서 미래의 보편성을 탐색하는 실험적 프로젝트가 등장하고 있다.
시대 변화에 응답하는 혁신적 교육 공간
2022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에 완공된 ‘스터디 파빌리온’이 그 한 사례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확산과 인공지능(AI)의 비약적 발전은 전통적인 대학 캠퍼스가 디지털 시대에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베를린 건축가 구스타프 뒤징과 막스 하케가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학생과 교수의 교류와 학제 간 지식 생산을 촉진하는 유연한 ‘사회적 공간’을 제시했다.
캠퍼스 중심부에 있는 정방형 2층 건축물은 흰 철골 구조가 정교하게 직조된 형태로, 자유로운 놀이를 유도하는 정글짐을 연상시킨다. 1층은 중앙의 화장실 영역을 제외하면 고정된 벽체 없이 사방으로 열려 있으며, 2층은 불규칙하게 배치된 플랫폼이 다리로 연결돼 있다. 아홉 개의 계단이 층과 층을 잇고, 수평과 수직의 흐름이 교차하며, 유기적 공간을 형성한다. 벽이 없음에도 공간은 서로 다른 성격의 활동을 자연스럽게 끌어내고, 학습·토론·휴식 등 다양한 행위가 경계를 넘나들며 공존한다. 이 다층적 공간 경험은 전통적인 위계적 교육 공간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미래 재료 저장소로서 건축
스터디 파빌리온의 진정한 혁신은 공간 형태보다 그것을 지탱하는 구조와 재료에 대한 환경적 사고방식에 있다. 건축가는 이 건물을 일시적 설치물이자, 미래의 재료 저장소로 설계했다.
건물의 주요 구조는 3×3m 격자를 따라 배치된 철제 프레임으로 구성된다. 각 부재는 접착이나 용접이 아닌 볼트와 너트 등 기계적 접합 방식으로 연결되어 손상 없이 해체와 재조립이 가능하다. 이 덕분에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조립 키트처럼 작동하며, 플랫폼을 추가해 밀도를 높이거나 위치를 옮겨 전혀 다른 형태로 변주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유연성은 시공 효율을 넘어 ‘자재 순환성’이라는 건축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계단, 창호, 바닥, 설비 덕트 등 모든 구성 요소가 새로운 맥락에서 재사용될 수 있으며, 이는 단순한 재료의 재활용이 아닌 ‘순환적 건축’의 실천을 보여준다.
에너지 측면에서도 건물은 80%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공급받는 지역난방 시스템을 활용한다. 수평으로 돌출된 지붕은 여름철에는 차양으로, 겨울철에는 태양열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패시브 장치로 작동한다. 또한 창문과 천창을 통한 자연 환기 시스템은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유지하면서 기계 설비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한다. 이처럼 건물은 시공과 철거 단계는 물론,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 환경적 부담을 줄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결국 스터디 파빌리온은 고정된 완성체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과정, 더 큰 환경적 순환의 일부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건축은 필연적으로 환경 부담을 낳는다’는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부담을 설계를 통해 감당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음은 영화 속 만수처럼 왜곡된 합리화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불합리한 현실을 뒤흔드는 혁신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