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면 들녘마다 벼와 과일이 누렇게 익어간다. 하늘은 높다. 수확의 계절이다. 한 해의 수고가 결실을 보는 이 시기에 문득 떠오르는 화가가 있다.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다.
그의 대표작 ‘이삭 줍는 여인들(The Gleaners, 1857)’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닮았다. 황금빛 들판, 세 여인이 허리를 굽혀 남은 이삭을 하나씩 주워 담는다. 따스한 햇살 아래 평화롭고 정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1857년 처음 파리 살롱전에 걸렸을 때 반응은 뜻밖이었다. 관람객은 놀랐고, 평론가는 불편해했다. “불온하다, 위험하다.” 어떤 이는 “혁명적”이라고까지 말했다. 평화로운 농촌의 수확 장면을 그린 농민화가 왜 혁명적으로 읽혔을까.
이삭 줍는 여인들, 노동이 예술이 되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프랑스가 산업화와 도시화로 급변하던 시기에 그려졌다. 그 무렵 유럽 전역을 덮친 흉작으로 곡물 가격이 폭등했고, 파리에서는 실업자와 빈민이 급증했다. 농민은 점점 도시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 무렵 밀레는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농촌 지역 바르비종에 머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그리는 동료 화가와 함께 작업에 몰두했다.
밀레가 평생 사랑한 주제는 농민의 삶이었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그가 10여 년 동안 집요하게 탐구해 온 ‘이삭 줍는 사람들’이라는 주제의 결실이자 정점이다. 해 질 녘 들판, 세 명의 여인이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는다. 하루의 빛이 서서히 기울고, 남은 낟알 몇 줌을 손에 쥔 그들의 모습에는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생의 간절함이 배어 있다. 밀레는 이 세 여인을 나란히 세워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고, 다시 일어서는 세 동작을 포착했다. 석양의 빛이 그들의 어깨와 손, 등선을 비추고 있고, 그들은 캔버스에 그려진 조각상처럼 느껴진다.
화면 오른쪽에는 말을 탄 한 남자가 멀찍이 서 있다. 그는 이삭 줍는 여인들을 감시하는 눈이다. 그 한 사람의 존재가 그림 전체의 느낌을 바꾼다. 풍요의 들판과 가난한 여인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 그것이 바로 당시 사회의 현실이었다. 이 그림에는 거창한 과장이 없다. 밀레는 가난을 비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굽은 허리의 여인들 속에서 노동의 신성함과 함께 농촌 현실을 담담히 그려냈다.
'룻과 보아스'에서 시작된 밀레의 혁명
‘이삭 줍는 여인들’이 농민의 노동을 숭고한 의식처럼 그려냈다면, 그보다 앞서 완성된 ‘룻과 보아스(Harvesters Resting, 1850~1853)’는 밀레가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구체화한 결정적인 이정표였다. 밀레는 이 작품을 자신의 걸작으로 여겼으며, 다른 어떤 그림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룻과 보아스’는 바르비종 지역의 농촌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곡식 더미 근처에서 식사와 휴식을 취하는 수확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원래 ‘Ruth and Boaz’로 알려진 이 그림은 구약성서 ‘룻기’의 장면을 재해석한 것이다. 미망인 룻은 시어머니와의 생계를 위해 수확자들과 함께 일하며, 수확이 끝난 뒤 이삭 줍는 일을 했다. 화면 왼쪽의 남성은 지주 보아스로, 룻을 추수꾼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식사하자고 권유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여성들은 음식을 준비하거나 기다리고 있으며, 오른쪽 남성들은 짚단에 누워 여유롭게 그 광경을 지켜본다.
밀레는 이 장면을 이상화하지 않고, 자기가 실제로 목격했을 법한 바르비종의 풍경처럼 담담히 재현했다. 흰색·파란색·갈색으로 표현된 수확자들의 옷차림은 농촌의 소박함을 드러내며, 각 인물은 개별적인 성격과 표정으로 고요한 조화를 이룬다. 또한 이 작품은 밀레가 자기 작업 연도를 직접 기록한 유일한 작품이며, 그의 생애에서 공식적인 상을 받은 단 한 점의 그림이기도 하다. 1853년 파리 살롱전에서 이 작품으로 그는 2등 메달을 수상하며, 예술가로서 처음이자 유일한 공인을 얻게 됐다.
노동의 숭고함이 그려낸 '만종'
밀레의 ‘만종(기도·L’Angélus, 1857~1859)’ 은 들판에서 하루 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해 질 녘 종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춰 기도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 두 인물은 감자밭 한가운데 서 있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고, 여자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그들 곁에는 감자 포크, 바구니, 자루, 수레 같은 노동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멀리 교회 첨탑이 붉은 하늘 아래 희미하게 서 있다. 밀레는 이 단순한 장면을 극적인 구도나 장식 없이 담담하게 그렸다. 거대한 평원한가운데 선 두 농부는 작은 캔버스에 비해 존재감을 지닌다. 얼굴은 그림자에 묻혀 있지만, 석양 빛이 어깨와 손끝, 굽은 허리를 감싸며 노동의 경건함과 기도의 고요함이 맞닿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밀레는 ‘만종’을 종교화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다. 그는 1865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밭에서 일하던 중 교회 종소리를 들으면, 할머니는 일을 멈추고 가난한 영혼을 위해 안젤루스 기도를 드리곤 했다. 당시의 기억이 이 그림의 출발점이다.”
그 말 그대로, 이 작품은 거창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어린 시절 기억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만종’의 배경으로 그려진 교회 첨탑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 구매자와 거래가 무산된 뒤, 그는 작품을 다시 손보며 자기 고향의 교회 첨탑을 덧그려 넣었다. 그 첨탑은 교리의 표식이 아니라, 노동의 하루가 끝나갈 때 들려오는 삶의 종소리, 즉 농부가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의 리듬을 시각화한 장치였다. 바로 만종이 단순한 종교화가 아니라, 세속적인 삶 속에서 진정한 경건함을 발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이 그림은 이후 여러 개인 소장가의 손을 거쳐 1889년 경매에서 프랑스 국립미술관이 인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프랑스의 수집가가 작품을 구입해 루브르박물관에 유증했고, 1910년 프랑스 정부가 정식으로 소장품으로 편입했다. 이 유증 과정은 프랑스가 자국 예술가의 유산을 지키고자 한 문화적 자존심의 표현으로 기록된다.
미술의 혁명을 꿈꾼 밀레
1850년대 파리 미술계를 지배한 것은 아카데미즘과 살롱전 체제였다. 화단 주류는 여전히 고대 신화와 성서, 나폴레옹 영웅담을 그리는 화가들이었고, 관람객 또한 도시의 중상류층이었다. 그들은 화려하고 이상세계를 원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밀레가 ‘이삭 줍는 여인들’을 내놓자, 파리 화단은 술렁였다. 그는 신이나 영웅이 아닌 이름 없는 농민 여인을 대형 캔버스 한가운데 세웠다. 상류층 관객은 “혁명의 그림 같다” “1793년 단두대가 떠오른다”고 반발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혁명이 됐다. 밀레는 미술의 위계를 뒤집었다. 그는 노동을 성스러운 의식으로 바꾸었다. 그의 붓끝에서 예술은 신화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 속 인간 삶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현실은 오히려 더 깊고 숭고했다. 즉 예술이 인간에게 돌아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