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방문한 도멘 카제스의 오너 리오넬 라바일. /사진 김상미
한국을 방문한 도멘 카제스의 오너 리오넬 라바일. /사진 김상미

도멘 카제스의 오너 리오넬 라바일은 포도 수확을 마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며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루시옹(Roussillon)과 서울은 멀지 않다. 루시옹에서 바르셀로나까지 거리가 서울 시내에서 인천국제공항 정도다. 거기서 직항을 타면 서울로 바로 온다.” 루시옹은 프랑스 최남단, 피레네산맥 동쪽 끝자락에 있다. 산이 많아 고도와 토질이 다양하고 동쪽으로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진 천혜의 와인 산지다.

루시옹은 원래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역의 일부였다. 17세기 중엽, 스페인과 프랑스가 오랜 다툼 끝에 피레네조약을 체결하면서 루시옹이 프랑스령이 됐고, 피레네산맥이 양국의 경계가 됐다. 이 조약으로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도 성사됐다. 그로부터 약 360년이 흘렀지만, 루시옹은 여전히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카탈루냐인이고 카탈루냐어가 통용된다. 라바일에 따르면, 축구도 FC 바르셀로나를 응원한다고 한다. “루시옹 사람도 한국인처럼 정이 많다. 음식을 한데 차려두고 함께 나누며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등 한국과 닮은 점이 많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루시옹을 빛낸 전통, 뱅 뒤 나튀렐

루시옹을 유명하게 한 것은 뱅 뒤 나튀렐(Vin du Naturel)이라는 주정 강화 스위트 와인이다. 생산지에 따라 리브잘트(Rive-saltes), 바뉼스(Banyuls), 모리(Maury)로 구분되는데, 적포도인 그르나슈 누아(Gren-ache Noir)로 만드는 바뉼스와 모리는 포트(Port)처럼 진한 붉은빛을 띠고 자두 잼, 체리 잼, 초콜릿, 감초 등 달콤한 향이 풍부하다. 리브잘트는 그르나슈 누아뿐 아니라 청포도인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으로도 만들어 색감과 스타일이 다채롭다.

국내에는 도멘 카제스의 리브잘트 3종이 수입되고 있다. 리브잘트 암브레(Ambré)는 에어 프랑스 여객기 일등석에서 제공된 와인으로, 호박색을 띠며 말린 살구, 캐러멜, 견과류 같은 아로마가 풍미를 장식한다. 리브잘트 그르나(Grenat)는 루비 빛이 진하고 농익은 체리와 은은한 향신료 향이 매혹적이다. 퀴베 애메 카제스(Cuvée Aimé Cazes)는 22년이나 숙성한 최상급 리브잘트로 말린 과일, 오렌지 껍질, 견과, 향신료 등 복합미가 탁월하고 감미로운 맛이 여운까지 길게 이어진다. 프랑스에서는 리브잘트를 푸아그라나 초콜릿과 자주 즐기지만, 한과와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라바일은 “와인의 색과 음식의 색을 맞추면 실패가 적다”라고 귀띔했다. 그렇다면 리브잘트 암브레에는 약과를, 리브잘트 그르나에는 단팥이 들어간 찹쌀떡을 곁들여 보면 어떨까.

뱅 뒤 나튀렐의 매력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포트와인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라바일은 이렇게 설명했다. “포트와인은 영국의 대형 주류 회사가 성장시킨 와인이다. 포르투갈과 영국이 대서양을 통해 오가기 쉽다는 지리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반면에 지중해에 접한 루시옹은 영국에서 뱃길로 오기에 너무 멀다 보니 뱅 뒤 나튀렐이 프랑스 내 소비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뱅 뒤 나튀렐을 신선하게 여기며 자주 찾는다.”

1 레 크레도. /사진 도멘 카제스 2 캅 베어 레드. /사진 도멘 카제스
1 레 크레도. /사진 도멘 카제스 2 캅 베어 레드. /사진 도멘 카제스

지중해의 바람과 햇살이 빚은 루시옹의 드라이 와인

오늘날 루시옹은 레드 와인으로 더 각광받고 있다. 1970년대부터 스위트 와인의 인기가 하락하자 드라이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고목이 많고 재배 환경이 워낙 좋아 단숨에 프리미엄 산지로 부상했다. 루시옹에서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인 도멘 카제스는 루시옹 와인의 세계화를 이끈 대표 주자다. 그들의 와인이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포도의 품질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도멘 카제스는 30년 전부터 유기농과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실천해 왔다. 환경은 물론, 포도 재배자와 소비자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친환경으로 기른 포도는 기후변화에도 더 강하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요즘 소비자는 과거보다 와인을 적게 마시지만 좋은 포도로 만든 와인에는 기꺼이 지갑을 연다.”

레 크레도(Le Credo)는 도멘 카제스의 와인 중 국내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한다. 1900년에 라바일의 증조할아버지가 심은 고목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이 레드 와인은 달걀 모양의 콘크리트 탱크에서 숙성되어 신선함과 우아함이 남다르다. 한 모금 맛을 보면 루시옹의 따스한 햇살과 신선한 바람이 입안을 한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캅 베어(Cap Bear)는 바다와 맞닿은 콜리우르 마을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레드와 화이트 두 가지가 있는데,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가 보여주는 특유의 짭조름한 맛이 달콤한 과일 향과 맛있는 조화를 이룬다. 그르나슈 누아와 시라(Syrah)를 블렌드해 만든 레드 와인은 묵직한 보디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농밀한 과일 향, 초콜릿, 향신료, 허브 등의 복합미가 매력적이다. 그르나슈 그리(Gren-ache Gris)로 만든 화이트는 복숭아, 자몽, 배 등 섬세한 과일 향과 화사한 꽃 향에 상큼한 산미와 짭짤한 미네랄리티가 생동감을 부여하며 풍성한 아로마를 한껏 펼쳐낸다.

라바일은 카제스 와인과 함께 즐긴 한식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고 했다. “한식은 양념 맛이 풍부해 루시옹 와인의 탄탄한 구조감과 상당히 잘 어울린다. 특히 그르나슈 누아로 만든 레드 와인과 불고기의 궁합이 훌륭했다. 오늘 밤에는 순대와 즐겨볼 생각이다.” 루시옹의 포도밭과 서울의 식탁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는 와인이 있다. 지중해의 바람과 햇살이 담긴 와인 한 잔이 두 문화를 부드럽게 잇는다.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