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양자 정상회담에서 대(對)중 관세를 10%포인트 인하하고, 중국산 희토류 수출 통제 1년 유예와 미국산 대두 수입 재개 등에 합의했다. 지난 10월 초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발표와 이에 대한 대응에 나선 미국의 100% 추가 관세 예고로 최고조에 달한 미·중 갈등이 봉합 국면에 들어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10월 30일 부산 김해 공군기지 의전 시설인 ‘나래마루’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의 회동은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서 만난 이후 6년 4개월 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시 주석에게 “매우 강한(tough) 협상가”라고 표현하며 “그건 좋지 않다”라고 농담을 던지면서도 “매우 기품 있고 존경받는 중국 지도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시 주석 역시 트럼프 대통령에게 “세계 평화에 진심인 사람” 이라고 칭찬하면서도 “경제 대국이 가끔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항상 우리가 모든 일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뼈 있는 말을 하기도 했다.
트럼프 “시진핑과 회담 10점 만점에 12점”
100분간의 미·중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트럼프 대통령은 전용기에서 가진 약식 기자회견에서 “멋진(amazing) 회담이었다” “10점 만점에 12점”이라고 자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희토류 (문제)가 전부 해결됐다. 그 장애물은 이제 없어졌다”고도 했다. 중국이 최근 취한 희토류 수출 통제 조치를 1년간 유예하기로 한 것. 중국은 미국이 지난 4월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 주요국을 상대로 상호 관세를 부과하는 관세전쟁에 돌입했을 때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를 들고나왔다. 중국은 이후 미국과 협상으로 희토류 공급 재개에 합의했다가 지난 10월 초 더 강한 통제 카드를 던졌다. 중국산 희토류 수출뿐 아니라 해외에서 중국산 희토류나 중국의 정제 기술을 사용한 제품이나 부품도 중국 정부의 수출 승인을 받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이 조항은 12월 1일부터 시행할 예정이었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매장량에서는 절반에 못 미치는 48.9%를 차지하지만, 생산량 70%, 정제와 가공은 90%, 자석 제조는 93%를 점유하고 있다. 사실상 공급망을 장악한 것이다. 문제는 희토류가 전기차부터 전투기까지 핵심 전자 제품과 부품, 군사용 무기 등의 필수 원자재라는 사실이다. 확대 정상회담에 참석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우리는 희토류에 대한 중국의 수출 통제에 집중했으며 중국이 공급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언급한 배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중국이 미국산 대두 구매를 즉시 재개하는 등 막대한 미국산 농산물을 수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대두 수입국인 중국은 5월부터 미국산 대두 수입을 전면 중단해, 지난 1~7월 미국의 대중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51% 감소했다. 중국이 미국산 대두 구매를 전면 중단한 건 1999년 이후 처음으로, 미국산 대두 가격이 급락하고 재고가 쌓이며 미국 농가의 피해가 불어났다. 트럼프 지지층이 있는 중서부 농가에 피해가 집중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와 함께 “중국이 합성 마약 펜타닐의 미국 유입 방지를 위해 큰 노력을 하기로 했다”며 “(중국에 부과한) ‘펜타닐 관세’를 20%에서 10%로, 10%포인트 인하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기 정부 출범 후 ‘좀비 마약’ 으로 불리는 펜타닐 유입을 문제 삼아 중국에 추가 관세를 부과해 왔다.
두 정상 합의로 대중 관세는 47%로 낮아졌다. 한때 미국과 중국은 보복관세를 서로 물리기로 하면서 상대국에 각각 145%, 125%까지 관세 부과를 예고했지만, 이후 협상을 통해 관세를 낮춰 왔다.
시진핑 “불법 이민, 자금 세탁, AI 분야 협력” 강조
시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양국 경제·무역팀이 심도 있게 의견을 교환했고, 문제 해결에공감대를 형성했다”며 “양측 팀은 후속 작업을 서둘러 구체화하고 확정해, 공감대를 잘 지키고 잘 이행해야 한다. 실질적인 성과로 중·미 양국과 세계경제에 ‘알맹이’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전했다. 또 “경제·무역은 중·미 관계의 안정추이자, 추진기가 돼야 하며,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 장기적 이익을 더 바라봐야 하며, 상호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시 주석은 이와 함께 불법 이민, 통신 사기, 자금 세탁, 인공지능(AI), 감염병 대응을 꼽으며 “해당 분야에서 (미국과) 협력의 앞날이 밝다. 대화와 교류를 강화하고 상호 이익적 협력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대화가 대립보다 낫다. 중·미 간에는 각 경로와 각급에서 소통을 유지해 상호 이해를 증진해야 한다”며 “2026년 중국은 APEC 의장국을 맡고, 미국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주최한다. 양측은 상호 지원하여 두 정상회의가 모두 긍정적 성과를 거두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엔비디아의 최신 AI 반도체인 ‘블랙웰’의 중국 내 공급은 논의하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이 엔비디아 저사양 AI 반도체를 중국 시장에 수출하는 것은 허가하고 있지만, 중국 당국이 현지 기업들에 구매를 금지시킨 상태다. 트럼프는 “우리는 중재자로서 지켜볼 것이다.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와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이번 정상회담 합의의 틀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이뤄진 미·중 고위급 회담에서 만들어졌다.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미·중은 지금까지 5차례 무역 회담을 했다.
민감한 대만 문제 언급 안 해… 불안한 합의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거의 모든 것에서 매우 수용 가능한 형태로 합의했다”며 “많은 결정이 이뤄졌고 남은 것이 많지 않다” 고 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가 근본적 관계 개선보다 일시적 ‘관리 국면’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양국 모두 자국 내 정치·경제적 부담을 고려해 확전을 피했지만, 기술 패권과 안보 이슈 등 근본 갈등 요인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민감한 외교 문제인 대만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종전(終戰)을 위해 양국 정상이 협력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4월에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후 시 주석이 미국을 답방하기로 했다.
미·중 무역 전쟁은 일시적 휴전(休戰)에 이르렀지만, 안보·경제 패권 등을 둘러싼 경쟁은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