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붐 타고 급성장한 미스터리한 거물
천즈는 중국 남동부 푸젠성에서 성장했다. 처음에는 작은 인터넷 게임 회사에서 일했다가 2011년 캄보디아로 건너가 당시 호황을누리던 부동산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캄보디아 입국은 현지에서 부동산 투기 붐이 시작되던 시기와 맞물렸다. 그는 2014년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캄보디아 시민권을 취득했다. 천즈는 본인 명의로 토지를 매입할 수 있게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운용하는 자금 출처는 항상 불분명했다. 2019년 맨섬(Isle of Man)에서 은행 계좌를 개설하면서 200만달러(약 28억8000만원)를 예치했는데, 자금 출처에 대해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삼촌’에게서 받았다고 기재했다. 그가 2015년에 설립한 부동산 개발 회사 프린스그룹은 상업은행인 프린스뱅크를 세우고 항공사까지 출범하며 급격히 성장했다. 프놈펜의 고급 쇼핑몰, 시아누크빌의 5성급 호텔 등 대규모 부동산 개발을 진행하며 캄보디아 재계를 장악했다. 또 영국 런던 북부에 1200만파운드(약 230억1800만원)짜리 대저택과 시티 금융가에 9500만파운드(약 1822억3000만원)짜리 오피스 빌딩을 구입했고, 미국에서는 개인용 제트기와 초호화 요트, 피카소 그림까지 사들이기도 했다.
캄보디아 최고위층·싱가포르와 연계해 영향력 키워
천즈가 짧은 시간 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훈 센 전 캄보디아 총리 등 캄보디아 최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천즈는 다양한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며 캄보디아 국왕이 수여하는 최고위 귀족 칭호인 ‘옥냐(Neak Oknha)’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훈 센 전 총리와 그의 아들인 훈 마네트의 공식 고문을 맡기도 했다. 캄보디아 현지 매체는 천즈를 장학 사업과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대응에 큰 기부를 한 자선가로 치켜세우며 그의 범죄 행각을 가리는 데 일조했다.
프린스그룹이 영향력을 키우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바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사업 환경으로 유명한 아시아 금융 중심지 싱가포르와 연계다. 이른바 ‘싱가포르 워싱’을 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 검찰을 인용해 “프린스그룹의 자금 세탁을 도운 위장 조직 형태의 12개 회사가 싱가포르에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라고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의 합동 제재 과정에서 12개 이상의 싱가포르 기관과 세 명의 싱가포르인이 제재받았는데, 검찰 기소장에는 싱가포르인 한 명이 천 회장의 ‘공모자’로 기재되기도 했다. 그는 프린스그룹의 사기 행각을 감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재 대상 외에도 여러 싱가포르 개인과 회사가 프린스그룹 이미지와 기업 전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프린스그룹 커뮤니케이션 책임자인 가브리엘 탄과 부동산 사업부 책임자인 에드워드 리가 대표적이며, 이들은 사이버 사기 조장 혐의로 제재 대상자로 명시됐다.
인간의 고통 위에 세워진 ‘사기 제국’의 실체
프린스그룹의 범죄 행각은 2019년 시아누크빌에서 온라인 도박이 금지된 후 더욱 극단적으로 변했다. 도시에서 하던 주력 사업이 붕괴하자, 천즈는 사업을 사이버 사기로전환하고, 조직적인 인신매매를 통해 일반인까지 범죄로 끌어들였다. 캄보디아에 납치된 한국인이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프린스그룹이 캄보디아 내 최소 10개의 사기 조직을 운영하며 성범죄(미성년자 협박 사기), 다양한 형태의 사기 및 협박, 부패, 불법 온라인 도박뿐만 아니라 산업적 규모의 인신매매, 고문, 노예 노동자 강탈을 통해 이익을 얻고 있다. 특히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와 베트남 국경 근처의 ‘골든 포천 과학기술 단지’가 사기 제국의 핵심 거점으로 꼽힌다. 이들 지역에서는 탈출하려던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출신의 사람들을 잔혹하게 구타하고 동시에 이들에게 온라인 사기를 강요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국제 제재 확산과 천즈의 잠적
미국과 영국의 제재 이후 싱가포르와 태국 정부도 자국 내 프린스그룹 계열사에 대한 조사를 약속하는 등 파장이 커지고 있다. 캄보디아 정부는 “미국과 영국 당국이 혐의 입증에 충분한 증거를 제시해달라”는 원론적 입장만 내놓고 있지만, 집권 엘리트와 천즈의 오랜 친밀한 관계 때문에 그와 거리를 두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캄보디아는 이미 사기 사업에 대한 관용 때문에 국제적인 압박을 받는 중이었는데, 일각에서는 이 사업이 국가 전체 경제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것이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제재 발표 이후 캄보디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던 천즈는 공식 석상에서 종적을 감춘 상태다. 최고위층 귀족 작위와 자선사업가라는 위장막을 이용해 막대한 범죄 수익을 벌어들인 미스터리한 거물은 현재 흔적을 감춘 채 국제 수사망을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해킹 조직 암호화폐 세탁한
후이원그룹, 스테이블코인 발행도
프린스그룹과 함께 한국인 대상 범죄 조직의 배후로 지목된 곳으로 캄보디아 금융 서비스 업체인 후이원그룹이 있다. 후이원그룹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 라는 별명을 가진 결제 플랫폼 ‘후이원페이’를 앞세워 덩치를 키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제 해킹 조직이 랜섬웨어, 사이버 사기로 벌어들인 범죄 수익을 세탁하는 핵심 통로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후이원그룹이 이처럼 대담한 범죄 행각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캄보디아 최고위층과의 긴밀한 유착이 있다. 후이원페이의 주요 주주로 전 캄보디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등록되어 있었다는 점은 후이원그룹이 단순 기업이 아닌 권력의 방패 아래서 활동했음을 시사한다.
후이원그룹의 가장 심각한 범죄 혐의는 북한의 악명 높은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 맺은 검은 커넥션이다. 스위스 소재 국제 비정부기구인 글로벌이니셔티브(GI-TOC)가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후이원그룹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890억달러(약 128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암호화폐 거래를 중개했다. 이 거래는 범죄 수익과 연관된 것으로 대부분이 북한 라자루스에 흘러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후이원그룹은 라자루스에 범죄 수익 세탁을 맡기는 대신 불법 온라인 사기 사이트 제작 등의 기술적인 업무를 라자루스에 맡기는 상호 협력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다.
또 후이원그룹은 자체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 북한이 복잡한 국제금융 규제를 손쉽게 우회하고,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도록 도운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단순한 자금 세탁을 넘어 사실상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자금 조달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해석된다.
후이원그룹의 심각한 범죄 행위가 드러나면서 국제사회의 제재가 시작됐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5월 후이원그룹을 ‘주요 자금 세탁 우려 금융기관’으로 공식 지정했고, 미국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접근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앞선 지난 3월에는 캄보디아 금융 당국인 국립은행이 후이원페이의 은행 면허를 취소하기도 했다. 연이은 제재가 내려지자 후이원그룹은 영업을 중단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등 사실상 잠적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