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할래가 유럽 현지에서 전통주를 알리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소주할래
소주할래가 유럽 현지에서 전통주를 알리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소주할래

흔히 ‘소주(Soju)’라고 하면,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조차 초록 병에 담긴 희석식 소주를 먼저 떠올린다. 국내 주류 시장에서 증류식 소주가 차지하는 출고액 비중은 1%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65년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하는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증류식 소주는 위상을 잃었고, 주정에 물을 섞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증류식 소주는 1990년대 전통주 허가제가 도입된 이후 부활했다. 전통 방식으로 빚은 증류식 소주는 사용하는 쌀의 품종이나 숙성 방식에 따라 과일 향, 오크 향 등 고유하고 다채로운 향이 있다. 이러한 매력에 반해 한국에서도 시장 규모가 작은 전통주를 유럽으로 유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일 전통주 수입 업체 ‘소주할래(Soju Halle)’의 허영삼 대표가 대표적이다. 우리 전통주를 ‘쌀 와인’이라 부르는 허 대표를 최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허영삼 소주할래 대표 - 부산대 고분자공학 석사, 전 네페스 전략기획 담당 상무 이사, 전 독일 바이오마그네틱파크 대표
허영삼 소주할래 대표 - 부산대 고분자공학 석사, 전 네페스 전략기획 담당 상무 이사, 전 독일 바이오마그네틱파크 대표

소주할래는 25년간 의료 기기 업계에 몸담았던 허 대표가 2023년 독일에서 세운 한국 전통주 전문 유통 업체다. 당시 함부르크의 한 의료 기기 스타트업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일하던 그는 아들 친구가 한국에서 가져온 전통주를 맛본 순간 그 매력에 사로잡혔다. 허 대표는 “과거 한국에서는 주로 취하기 위해 술을 마셨지만, 유럽에 오니 술의 맛을 음미하며 즐기게 됐다”며 “오랜만에 전통주를 맛보니 와인에 견줄 만큼 풍미가 뛰어나, 유럽의 술 문화와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허 대표는 전통주의 가능성을 확신했고, 같은 뜻을 가진 건축가, 물류 전문가, IT 전문가와 함께 소주할래를 설립했다.

전통주 유통에 뛰어든 의료 기기 CEO

소주할래는 전통주(소주)와 전시장·홀을 뜻하는 독일어 Halle를 합쳐 만든 이름으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각 가정과 다양한 공간에서 한국 전통주를 즐기는 문화를 확산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소주할래가 유통하는 제품은 한국 주세법 제2조 제8항에 규정된 전통주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빚은 술이나 ‘대한민국 식품명인’이 만든 주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소주할래의 제품군은 크게 두 가지다. 쌀 등 곡물을 발효해 만든 약주 그리고 이를 다시 증류해 만든 증류식 소주다. 이강주, 송이주, 솔송주 등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전통주가 소주할래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유통되고있다. 허 대표는 현지 식문화에 맞춰 한국 전통주의 포지셔닝을 제시했다. 

그는 송이주와 우렁이쌀 청주는 후식주로, 이강주와 담솔은 K-칵테일 베이스나 식후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문경 오미자를 원료로 한 오미로제 연 스파클링 와인은 와인 문화에 익숙한 현지인에게 식전주나 만찬주로 선보이고 있다.

탁주의 경우 유통 과정에서 변질을 막기 위해 한국산 쌀과 누룩을 직접 가져와 현지에서 양조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허 대표는 “쌀로 빚은 전통주는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이곳의 식문화와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최근 쌀 소비와 한식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쌀의 구수한 맛과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은은한 단맛이 유럽인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고 말했다.

소주할래에서 유통 중인 한국 전통주들. /소주할래
소주할래에서 유통 중인 한국 전통주들. /소주할래

맛도 중요하지만, 소주할래가 가장 우선시하는 전통주 선별 기준은 유럽연합(EU) 식품 규정 준수 여부다. 이와 관련해 허 대표는 “유럽의 식품 관련 규정은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지만, 다행히 식품 규정과 의료 기기 규정의 기본 원리가 유사했다”면서 “의료 기기 분야에서 쌓은 경험 덕분에 전통주 수입 준비를 한결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주 양조장을 직접 방문해 EU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선별하고, 각 제품의 상표를 규정에 맞게 제작·부착해 유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 어디서든 전통주 마실 수 있길”

전통주의 맛에는 확신이 있었지만, 이를 유럽 시장에 정착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럽은 와인 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은 데다, 한국 전통주의 인지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허 대표는 “우리 전통주를 유럽 고객에게 소개하려면 전통주에 대한 이해가 깊은 소믈리에나 음식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이런 전문가를 독일에서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며 “게다가 한국 전통주는 좋은 맛을 유지하면서 대량생산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격이 높다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했다.

그가 찾은 돌파구는 바로 ‘발로 뛰기’였다. 허 대표는 소주할래 창업 초기부터 전통주를 들고 베를린 지역의 내추럴 와인바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당시 베를린에서는 첨가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자연 발효한 내추럴 와인이 유행했는데, 그는 내추럴 와인과 전통주의 특성이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소주할래는 현재 독일은 물론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지에 100여 곳의 고객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다양한 협업과 적극적인 마케팅도 진행했다. 허 대표는 독일 출신의 일본 사케 전문가와 협업을 진행하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파리·프랑크푸르트 지사의 협조를 받아 전문 와인 전시회, 전통주 팝업스토어, K-팝 이벤트 등에 참여하며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또한, 전통주의 높은 진입 장벽으로 여겨졌던 가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양조장과 코트라(KOTRA)의 협력을 통해 물류 원가 절감에도 힘쓰고 있다고 허 대표는 전했다.

허 대표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독일의 유력 일간지에 한국 전통주를 소개하는 기사도 실렸다. 소주할래는 지난해 8월, 프랑크푸르트 마인강변에서 열린 축제에 부스를 마련해 막걸리·탁주·소주 등과 함께 한국의 술 문화를 소개했다. 이 기간에 독일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의 기자가 부스를 방문한 후, ‘Von Medusas Far-ben und milchigem Wein(메두사의 색깔과 우윳빛 와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 전통주인 막걸리를 소개했다.

소주할래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허 대표는 “소주할래의 목표는 한국 전통주를 통해 한국의 술 문화를 독일과 유럽 전역에 알리는 것”이라며 “앞으로 대한민국 식품명인이 장인정신으로 빚은 전통주 라인업을 확대해 유럽 시장에 보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통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유럽 어디서든 우리 전통주를 쉽게 만날 수 있는 날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김송이 조선비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