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지배하던 노키아는 터치스크린과 애플리케이션 중심의 스마트폰 확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불과 10년 사이 시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반면 삼성전자는 장기적인 반도체 투자 전략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했고, 애플은 파산 직전의 위기에서 아이폰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 차이는 단지 기술이나 자본, 브랜드 같은 자원의 보유 여부가 아니라, 그 자원을 ‘전략으로 연결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핵심은 자원을 어떻게 전략으로 전환하는가, 즉 조직이 보유한 자원을 어떤 구조와 문화, 제도에서 활용하고 엮어내는가다.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는 이 주제를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했던 흑인 여성 과학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풀어낸다. 이 작품은 조직이 내부의 잠재된 자원을 발견하고, 이를 제도와 문화 속에 녹여 전략 자산으로 바꾸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인다. 냉전의 긴장감 속에서 국가적 과제가 된 우주개발은 막대한 예산과 기술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제도와 인식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개인이 조직 구조를 바꾸고, 전략의 중심으로 부상하며 성공을 이끌어내는 이 영화는 자원 기반 전략(RBV·Resource-Based View)의 현실 사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숨겨진 자원의 발견, 전략으로의 변화
1961년, 냉전의 긴장이 극에 달하던 시기. 나사는 소련의 우주 선점에 충격을 받은 뒤, 우주개발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로켓과 우주선, 인력과 예산을 빠르게 동원했지만, 그 시스템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문제였다.
영화는 이 문제를 세 명의 흑인 여성 과학자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캐서린 존슨은 수학자로서 천재적 계산 능력을 갖추었으나, 백인 남성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늘 주변인이다. 회의 참석을 허락받아야 하고,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도 그녀의 이름은 보고서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우주인 존 글렌의 귀환 궤도를 완벽히 계산해, 나사의 미션을 성공으로 이끈다. 이 장면은 ‘존재하던 자원’이 ‘전략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도로시 본은 계산부서의 비공식 관리자다. IBM 컴퓨터가 도입되자 많은 동료가 해고를 걱정했지만, 그녀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독학하고 이를 동료와 공유한다. 도로시는 결국 흑인 여성 최초로 IBM 컴퓨터를 직접 가동하는 프로그래머가 된다. 이는 개인의 학습이 조직의 역량으로 확장되는 장면이다.
메리 잭슨은 뛰어난 기술자지만 엔지니어자격을 얻기 위해 백인 전용 학교의 문턱을 넘어야 했다. 법정에서 그녀는 판사에게 “당신이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려야만 나도 전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제도의 장벽을 뚫는다. 그녀의 돌파는 제도적 한계를 조직의 성장 동력으로 바꾸어 놓았다.
세 여성의 서사는 단순히 ‘존재’하던 자원이 ‘전략화’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캐서린의 계산 능력, 도로시의 학습, 메리의 제도 돌파는 각각 자원의 가치, 모방 불가성, 조직화를 상징한다. 우주 경쟁이라는 외부 압력이 내부 자원의 활용 구조를 재편하면서, 나사는 기술이 아닌 ‘사람 자원’을 전략으로 연결하여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VRIO로 본 전략 자원의 조건
제이 바니가 정립한 자원 기반 전략의 핵심은 가치(Value), 희소성(Rarity), 모방 불가성(Inimitability), 조직(Organization)이다. 이른바 VRIO로 불리는 이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할 때 조직이 보유한 자원은 비로소 경쟁 우위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 캐서린 존슨이 보여준 수학 능력은 나사의 임무 성공을 보장한 ‘가치’ 그 자체였다. 우주비행사 존 글렌은 “그녀의 계산이 아니라면 나는 비행하지 않겠다”는 말로그 가치를 입증한다. 당시 사회구조상 흑인 여성으로서 그녀 수준의 수학 능력을 가진 인물은 극히 드물었기에 ‘희소성’ 또한 확고했다. 도로시의 사례는 ‘모방 불가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기술 습득을 학습과 공유의 문화로 바꾸었다. 개인의 학습이 집단의 능력으로 확장된 이 과정은 경로 의존성과 사회적 복잡성의 결과였기에, 경쟁자는 이를 문서로 복제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메리 잭슨은 법적 장벽을 넘어 엔지니어 자격을 얻음으로써, 개인의 잠재력을 조직의 공식 체계에 편입시켰다. 이는 자원이 ‘조직화’의 요건을 충족한 사례다. 이처럼 세 인물의 서사는 VRIO의 각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자원이 전략으로 전환되며 지속 가능한 경쟁 우위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진화하는 자원, 깨어나는 조직
‘히든 피겨스’는 자원을 ‘고정된 요소’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진화하는 유기체’로 그린다. 도로시의 학습과 전파는 자원이 스스로 움직이며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자기 조직화’의 전형이다. 그녀는 외부에서 도입된 IBM 컴퓨터라는 낯선 변화를 두려워하는 대신, 스스로 익히고 그 지식을 동료와 나누었다. 자율적 학습이 조직 전체의 적응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복잡 적응 시스템(Complex Adaptive System)에서 관찰되는 진화의 대표적 모습이다. 자원의 확장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연결과 학습의 확산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메리의 법정 투쟁은 조직이 자원을 수용하기 위해 경계를 바꾼 사례다. 그녀는 법이라는 외부 시스템을 활용해 내부 질서를 다시 쓰면서, 조직이 새로운 인재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캐서린의 사례는 인식의 변화가 자원의 가치를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알 해리슨 국장이 ‘흑인 전용 화장실’ 표지판을 부수는 장면은 조직 문화가 변화와 포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영화는 자원이 전략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단순한 구조 개편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감정과 신뢰, 학습이 맞물려 움직이는 인간적 변화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조직의 운명을 바꾸는 자원의 전략화
영화에서 보여준 자원의 전략화는 현실 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패션 브랜드 자라(ZARA)는 디자인이 아닌 ‘속도’를 자원으로 삼았다. 글로벌 공급망과 실시간 데이터 공유를 통해 2주 내 신상품을 내놓는 시스템은 명백한 ‘가치’를 창출한다. 이를 글로벌 수준으로 실행 가능한 기업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희소성’도 있으며, 관계 기반 학습과 피드백 구조는 ‘모방 불가성’을 형성한다. 여기에 이를 가능케 한 의사 결정 체계는 ‘조직화’의 전형이다.
명품의 대명사, 에르메스는 장인의 기술과 전통을 ‘희소성’과 ‘가치’로 전환했다. 버킨백은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브랜드와 역사, 장인정신이 결합된 자원의 결정체다. 공급량을 제한하고 숙련 장인을 장기 양성하는 구조는 ‘모방 불가성’과 ‘조직적 활용’을 모두 만족시킨다. 레고는 커뮤니티의 창의성을 자원으로 재정의했다. 사용자의 자발적 창작 활동을 제품 개발에 연결해 창의성과 학습이 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물리적 제품을 넘어선 ‘관계 기반 자원’이 전략으로 전환된 사례다.
반면 노키아는 기술, 브랜드, 자본을 갖추고도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자원을 새롭게 해석하고 전략화하는 데 실패했기에 침몰한 것이다. 결국 경쟁 우위는 자원의 크기가 아니라, 자원을 ‘보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영화가 보여주듯, 전략은 밖에서 주어지는 해답이 아니라, 안에서 길러지는 시선이다. 그 시선이 깨어날 때 조직의 운명도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