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의존 사회에서 옷 벗기 두려워
기업의 임원이나 정부 부처의 고위 관료 사이에는 이런 오래된 농담이 있다. “자, 지금부터 다들 옷 벗고 편하게 식사합시다.” 이 말을 누군가 한다면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옷을 벗는다’는 말은 편안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해고’나 ‘퇴직’을 의미하는 말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곧 자기 존재 증명서인 이들 앞에서, 이런 농담조차 마음 편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역할에 대한 의존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C씨는 대기업의 유능한 부장이다. 성과도 뛰어나고 주변의 신망도 두터워 임원 승진 대상자 명단에 올랐고, 실제 회사 측에서 제안도 받았다. 사람들은 그가 당연히 수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임원이 되면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가야 한다. 아직 아이가 대학도 마치지 않았는데, 그 옷을 입는 순간 내 시간이 짧아지잖아.” 그는 옷을 입지 않음으로써 오래 남고자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 또한 옷에 대한 두려움의 또 다른 형태였다. 그에게 옷은 권위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퇴장의 신호였다. 결국 그는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없는 옷’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모 부처 국장이었던 D씨도 C 부장과 비슷한 사례다. 그는 평생 공직에 헌신하며 ‘묵묵히 일하는 실무형 인재’로 평가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차관 승진 제안을 받았다. 그는 거듭 고사했다. “내가 그 자리에 가면 오래 못 버틴다. 내 후배들이 더 오래 일할 거다.” 하지만 인사 명령은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차관으로 임명됐고, 예상대로 2년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로 그는 한동안 깊은 허무감에 시달렸다. “차라리 안 올랐다면 지금도 현직에 있었을 텐데⋯.” 그의 후회는 역할의 끝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단절에 대한 아픔이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런 현상은 인간의 본능 깊은 곳에 각인된 ‘소속 본능’과 관련이 있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남성은 주로사냥과 경쟁의 영역에서 자신을 증명해 왔다. 사냥터에서 지위는 곧 생존과 번식을 보장받는 자격을 의미했다. 사냥꾼이 사냥터를 잃는다는 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퇴직은 사냥터를 떠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전장은 사무실로, 사냥감은 프로젝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가 말한다. “굳이 전방 공격수가 아니어도 좋다. 수비수라도, 벤치라도, 경기장 안에만 있게 해달라.” 심지어 ‘메이저리그 아니어도, 마이너리그라도 불러만 달라’고 읍소한다. 자신이 뛰던 경기장을 완전히 떠나는 일은 곧 ‘존재의 무효화’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더 이상 그를 불러주는 팀은 없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낯선 공허와 마주하게 된다. 그때 많은 이가 다시 옛 직함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붙들거나 과거의 권위를 되살려 자신을 지키려 한다.
퇴직, 존재의 종말이 아닌 ‘자기 발견’의 무대
퇴직이 두려운 진짜 이유는 역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역할에 숨겨져 있던 ‘나 자신’의 민낯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인물을 떠올린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빅터 프랭클. 강제수용소에서 가족과 지위를 모두 잃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은 환경과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치료법을 창시했다. 이 치료법의 핵심은 인간의 근본적 동기는 쾌락이나 권력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는 통찰이다. 사회적 지위나 직함은 일시적일 뿐 진정한 존재의 근거는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에 충실할 때 드러난다. 정년퇴직 후에도 계속 일하고 싶다면, 그 일은 자신의 ‘존재의 증명’이 아니라 ‘존재의 표현’ 이 되어야 한다. ‘나는 아직 쓸모 있다’는 증명이 아니라 ‘나는 이 일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이어질 때 그 사람은 이미 옷을 벗은 자유인이다. 옷을 벗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용기다.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존재하려는 용기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건 ‘벗는 순간 사라질까 봐’가 아니라, ‘벗지 못한 채 영원히 갇히는 것’이다. 정년은 퇴장이 아니라, 회복과 자기 발견의 무대다. 이제는 사회가 준 옷을 내려놓고, 내 영혼의 온도를 느낄 차례다. 결국 이 이야기는 사회적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주도권을 되찾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입었던 모든 옷은 지나가는 역할일 뿐, 진짜 나를 감싸는 건 단 하나, 내 안의 생명력, ‘나 자신’ 그 자체인 것이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이 덧씌운 화려한 직함 뒤에 가려져 있던 본연의 나, 그 순수한 존재가 마침내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이유는 빛을 잃어서가 아니다. 하루의 모든 역할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만의 색깔로 빛나기 때문이다. 인생의 후반부도 그렇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기대나 평가가 아닌, 오롯이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자격을 얻었다. 옷을 벗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정년은 퇴장이 아니라 귀환이다. 세상이 부여한 역할의 무대에서 내려와, 마침내 나 자신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발견한다. 진짜 나는 옷을 입을 때가 아니라, 벗었을 때 비로소 빛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