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APEC 정상회의를 마친 후 회원국 정상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11월 1일 APEC 정상회의를 마친 후 회원국 정상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11월 1일 폐막한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는 자유무역 체제가 저물고, 자국 우선주의와 안보 논리가 경제를 덮은 각자도생의 글로벌 뉴노멀(new normal)이 확인된 무대였다.

이번 회의에서 21개 회원국 정상은 만장일치로 공동 합의문인 ‘경주 선언’을 채택했다. 그러나 선언문에는 APEC 설립 취지였던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 무역 체제 지지’라는 핵심 표현이 빠졌다.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와 자국 우선주의가 반영된 결과다. 2018년 APEC 정상회의에서 미·중 입장 차로 공동선언이 불발된 전례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의장국인 한국의 조율로 경주 선언이 채택된 것은 성과라는 평가다.

APEC 기반의 자유무역 가치는 희석됐지만, 한국이 제안해 채택된 ‘APEC AI 이니셔티브’는 변화한 시대를 상징한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국제기구에서 공동으로 참여한 최초의 인공지능(AI) 분야 정상급 선언이다. ‘인구구조 변화 대응 프레임워크’도 한국이 주도했다. 이번 APEC의 실질적 성과는 다자 회의 본무대보다 막후에서 진행된 양자 외교와 산업 협력에서 나왔다. 한국은 최대 현안이던 한미 관세 협상을 타결하고,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하 원잠) 건조 승인을 얻어냈다. 미·중은 ‘전술적 휴전’에 합의했다. 역대 최대 규모인 1700여 명의 글로벌 최고경영자(CEO)가 참석한 APEC CEO 서밋에서는 대규모 AI 산업 협력안이 발표됐다.

관세 협상 타결·안보 숙원 해결
이재명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를 앞둔 10월 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두 가지 핵심 성과를 거뒀다.

장기 교착 상태였던 한미 관세 협상은 정상회담 직전에 극적으로 타결됐다. 총 3500억달러(약 500조원)의 대(對)미 투자 패키지 중 최대 쟁점이던 현금 투자 규모를 2000억달러(약 286조원)로 확정하고, 연간 투자 상한을 200억달러(약 29조원)로 설정했다. 이번 합의는 APEC 정상회의 직전까지 ‘노 딜(no deal)’ 우려가 나올 정도로 난항이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방한 임박 때까지 8년간 매년 250억달러(약 36조원)씩, 총 2500억달러(약 360조원)를 투자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10월 29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 장관이 문자 협상을 벌인 끝에 “연 200억달러 이상 불가”라는 한국 측 최후통첩이 받아들여졌다.

총 5500억달러(약 786조원)의 사실상 백지수표를 미국에 쥐여준 일본과 달리, 한국은 연간 투자 상한을 설정하고, 총투자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또 현금 투자 외 1500억달러(약 214조원)는 한국 주도의 미국 조선업 부흥 프로젝트, 마스가(MASGA·Make America Ship Great Again·다시 미국 조선업을 위대하게)에 할당됐다. 마스가는 한국 조선사의 미국 직접투자(FDI)와 국내 공적 금융기관·민간 은행의 보증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정부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였다는 평가다. 관세 협상 타결로 한국은 자동차 관세를 인하(25→15%)받게 됐다. 반도체 관세도 대만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확보했다.

안보 최대 숙원이던 원잠 건조의 첫발도 뗐다.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원잠 연료 공급을 요청한 지 하루 만인 10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원잠 건조를 승인한다”고 소셜미디어(SNS)에 밝혔다. 군은 5000t급 이상 원잠 네 척 이상을 2030년대 중반 이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총사업비는 한국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KF-21 사업(16조5000억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정부는 총리실 산하 범정부 사업단 구성 검토에 들어갔다. 또 정부는 ‘비군사적 목적’에 국한된 한미 원자력 협정과 별도로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재처리 권한 확대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 네모 한 칸은 GPU 1만 장 
※ 총 26만 장, 최대 14조원 규모 추정/최신 GB200 그레이스 블랙웰,RTX 6000 시리즈 혼합 구성 
※ AI 팩토리는 엔비디아가 제시한 개념으로, 일반 데이터센터와 달리 지능을 생산하는 장소 
자료=‘이코노미조선’ 정리
※ 네모 한 칸은 GPU 1만 장
※ 총 26만 장, 최대 14조원 규모 추정/최신 GB200 그레이스 블랙웰,RTX 6000 시리즈 혼합 구성
※ AI 팩토리는 엔비디아가 제시한 개념으로, 일반 데이터센터와 달리 지능을 생산하는 장소
자료=‘이코노미조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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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하이라이트…14兆 ‘AI 팩토리’ 연합
APEC CEO 서밋은 ‘산업 협력의 장’이라는 의미를 남겼다. 화두는 단연 AI로,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맷 가먼 아마존웹서비스(AWS) CEO 등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 고위 임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모였다.

10월 31일 젠슨 황 CEO 특별 세션에서 엔비디아는 한국 정부, 4대 기업(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과 총 26만 장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공급하는 AI 팩토리 연합 계획을 발표했다. 최대 14조원에 달하는 규모다. 한국은 엔비디아가 공급할 GPU를 기반으로 ‘소버린 AI(Sovereign AI·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AI)’ 구축과 자동차·제조·반도체 등 주요 산업의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낼 예정이다.
엔비디아와 협력은 단순 GPU 공급에만 그치지 않는다. LG그룹과 로보틱스·의료 분야에서 협력하고, 삼성전자·SK텔레콤 등과는 AI 기반 6G(6세대) 무선 접속망(RAN) 개발에 나선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과는 양자 컴퓨팅 연구센터를 설립해 국가 슈퍼컴퓨터 ‘한강’을 기반으로 하이브리드 양자 연구를 추진하기로 했다. 가먼 CEO 역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등과 만나 AI 혁신 방향을 논의했고, 이 대통령 접견에서 2031년까지 50억달러 이상의 신규 AI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을 밝혔다.

각자도생 확인…관세·안보 불씨는 여전
APEC 회원국 정상의 만장일치로 경주 선언이 채택됐지만, 그 이면에는 APEC 정체성 약화라는 한계도 남았다. 선언문에서 WTO 중심의 다자간 자유무역 관련 표현이 대폭 축소된 것이 이를 상징한다.

한미 협상 역시 불씨가 남았다. 2000억달러라는 대미 현금 투자는 2026년 한국 예산안의 약 40%에 달하는 규모로, 장기적으로 정부 재정에 부담이 된다. 또 러트닉 상무 장관이 “반도체 관세는 이번 (관세 협상) 합의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자, 대통령실이 “대만에 비해 불리하지 않게 적용하기로 합의했다”라고 재확인하는 등 세부 쟁점이 엇갈렸다.

주변국과 관계 역시 안심할 수 없다. 중국은 미국의 원잠 도입 승인 직후 ‘핵 비확산 의무’를 언급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역시 자국 지지 기반 결집을 위해 강경 행보를 재개한다면, 과거사 문제가 협력의 걸림돌로 재부상할 수 있다.

결국 이번 APEC은 한국의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전략이 공식적으로 끝났음을 확인한 자리로, 사안별로 실리를 따져야 하는 복잡한 외교 방정식의 시작을 알렸다.
박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