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역동성은 더 일상적인 지적 노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서비스업이나 기술 산업 종사자 역시 틀을 깨기 전에 먼저 체계화된 규칙을 익혀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이를 두 가지 인지 체계의 구분으로 설명했다. ‘시스템 1’은 빠르고 직관적이며 자동적이고 ‘시스템 2’는 느리고 분석적이며 신중하다.
지식 노동자가 숙련될수록, 종종 스페인의 정복자 ① 에르난 코르테스를 본받아 ‘배를 불태우라’는 조언을 듣게 된다. 기술적 숙련이라는 안전망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집중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대서양을 건너게 해준 시스템 2식 사고를 내려놓고 오직 본능인 시스템 1을 신뢰하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제 AI는 지식 노동자의 경력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단계’를 없애버릴 위협이 되고 있다. 에릭 브린욜프슨, 바라트 찬다르, 루위 첸이 공동으로 수행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수백만 건의 미국 급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2년 말 이후 AI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직종 즉 고객 서비스, 커뮤니케이션,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22~25세 근로자의 고용이 1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같은 분야의 중장년층 근로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른 연구 결과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2025년 10월 세이드 마디 호세이니와 가이 리히팅거는 AI를 조기에 도입한 기업에서 더 가파른 고용 감소가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런 연구는 AI가 자동화를 위해 사용되는 직종에서 타격이 가장 크고 반대로 인간의 역량을 보완하는 형태로 사용되는 직종에서는 고용이 안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자동화 위험이 가장 큰 업무야말로 원래는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훈련의 장’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AI는 숙련된 직원의 직관과 판단이 뿌리내린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은행원이 노련한 협상가가 되는 것은 수많은 밤과 주말을 투자해 재무 모델을 조정한 경험 덕분이다. 엔지니어가 시스템의 논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도 수백 건의 사소한 오류를 찾고 수정한 결과다. 이런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체계화된 업무야말로 ② 암묵지(tacit knowledge)의 원재료다. 교과서로 배울 수 없는 바로 그 지식이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젊은 세대가 스스로 나아갈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그들의 ‘배’를 불태워버리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이미 기후변화처럼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남긴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또 하나의 ‘부채’를 물려받고 있다. 인지과학은 학습이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학습은 신체 작용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신경과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안에 따르면, 학습은 ‘신경 재활용(neuronal recycling)’에 의존한다. 즉, 뇌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기존 회로를 새로운 용도로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활용은 ‘행동’을 필요로 하며 ‘위임’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젊은 근로자가 기계가 한 일을 검증만 해서는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알고리즘을 감독하는 일만으로는 직관을 기를 수 없다. 모든 체계화된 지식을 기계에 넘겨버린다면, 몸으로 익히며 배우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며 숙련에 도달하고 창의적 자유를 꿈꾸는 일도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인지적 함정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기업과 사회 전반이 따라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반복적 업무의 존엄성과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반복은 항상 고된 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종 인지적 투자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러한 일의 형성적 힘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음악가도 음계 연습 없이 거장이 될 수 없다. 어떤 금융 분석가나 변호사도 주니어 시절의 지루한 업무를 거치지 않고 비즈니스 감각을 키울 수 없다. 우리가 기계에 맡기고 싶은 바로 그 반복적 과제가 결국 숙련의 기초를 다지는 토양이 된다.
둘째, 업무 흐름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 더그 맥밀런 월마트 최고경영자(CEO)가 “AI는 말 그대로 모든 직업을 바꿔놓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은 AI로 일부 업무를 자동화하더라도, 젊은 인재가 여전히 직접 실습하고, 실수하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다른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 진보는 효율성보다 ‘몰입’에서 비롯된다. 목표는 기존 일자리를 무조건 지키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 2식 사고에서 시스템 1식 사고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대 간 책임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모든 자동화의 결정은 단기적인 생산성 향상뿐 아니라, 그로 인해 미래 세대가 치르게 될 대가까지 함께 평가해야 한다. 학습의 단계를 없애버리면 다음 세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업 윤리 강령에는 환경 지속 가능성 조항과 더불어 ③ ‘인지적 품위(cognitive decency)’의 원칙을 포함해야 한다. 재럿이 쾰른 무대에서 그렇게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랜 세월 정해진 연습법을 따라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가 창의적 자유를 유지하려면, 배움에 필요한 시간을 지켜내야 한다. 동시에 변화도 수용해야 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필리프 아기옹이 보여주었듯, ‘창조적 파괴’는 진보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은 이미 AI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들은 서구 사회가 떠안은 인지적 부채를 오히려 기회로 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시각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다만 지금 당장은 그 부채가 존재하며 계속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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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① 스페인 탐험가이자 정복자. 지금의 멕시코 지역을 지배하던 아스테카 제국을 무너뜨린 인물이다. 부하들이 후퇴를 요구하자 ‘배를 불태우라’고 지시하며 돌아갈 길을 끊은 걸로 유명하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각오로 목표에 전념하라는 의미로 쓰인다.② 말이나 글로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지식. 개인의 경험, 직관, 감각, 숙련된 기술 등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공식적인 규칙이나 매뉴얼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영국 과학철학자 마이클 폴라니가 1966년 저서 ‘암묵적 영역(The Tacit Dimension)’에서 처음 제시했다. 자전거 타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아무리 말이나 글로 설명해 줘도 직접 몸으로 익히기 전까지는 자전거 타는 법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③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고 배우는 능력을 존중하며 그 과정을 기술이 침해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 원칙. AI가 인간의 판단과 학습을 대체해도 사회는 인간의 생각할 권리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