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할리우드는 또 한 명의 세기의 아이콘을 잃었다. 영화 ‘애니 홀(Annie Hall· 1977)’의 유명한 애드리브 감탄사 ‘라-디-다(la-di-da)’로 세상을 사로잡았던 배우, 다이앤 키튼(Diane Keaton)이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라-디-다(la-di-da)란 짧은 대사 하나로 그녀는 시대의 공기를 바꾸었다. 영화 초반부에서, 주인공 애니(다이앤 키튼 분)는 우디 앨런이 연기한 앨비와 처음 데이트한 뒤 긴장과 어색함을 가볍게 넘기려는 순간에 “라디다, 라디다, 라디라(La-di-da, la-di-da, la-la)”라고 중얼거린다. 이 대사는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였다. 명확한 뜻이 없지만, ‘어색하네! 뭐, 어쩌지?’ 같은 의미로 쓰였는데, 어색함을 웃음으로, 불안함을 매력으로 바꾼 그 즉흥적인 중얼거림이 키튼의 모든 것, 곧 자유롭고, 예측할 수 없으며, 완벽히 자신다운 존재를 상징하는 고유어가 됐다. 또한 1970년대 뉴욕 여성의 새로운 자아를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지금 시대로 표현하자면, 유행의 밈(meme·인터넷 유행 비유전적 문화 요소)을 일으킨 것이다.
키튼은 패션의 개념을 다시 정의한 혁명가로 기록된다. 1970년대 할리우드가 화려한 실루엣과 관능미를 경쟁하던 시절, 그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남성복 슈트와 중절모 그리고 헐렁한 타이 같은 여성성의 전형적인 코드에서 벗어난 파격이 그녀의 시그니처 룩이었다. 키튼에게 패션은 삶의 태도였고, 철학이었다. 패션을 통해 자아를 표현했고, 동시에 그 옷을 입는 여성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새로 썼다. 슈트와 모자, 단정한 화이트 셔츠와 블랙 팬츠로 완성된, 그 절제된 미학은 지금 우리가 젠더리스(gender-less)와 모던 클래식(modern classic)이라 부르는 모든 스타일의 원형이다. 그렇게 키튼은 주류 유행을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시대가 그녀를 따라오게 했다. 그리고 그 우아한 반항은 여전히 패션 트렌드의 중심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다.
톰 브라운의 아방가르드하면서도 구조적인 남성복 코디네이션이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비 필로 시절의 셀린느에서 선보였던 미니멀하고 매니시한 룩 등, 수많은 현대 디자이너가 키튼이 재창조한 젠더리스 스타일에서 직간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로제가 미국 켈릭 클락슨 쇼에 생로랑의 슈트와 넥타이 룩으로 출연해 바이럴의 물결을 탔던 적이 있다. 아버지 슈트를 입고 나온 듯해, 대드코어(dadcore)로 표현하기도 했던 이 룩 역시 키튼을 추억하게 했다.
키튼 시그니처 룩의 시작은 단연, 앨런 감독의 영화 ‘애니 홀’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동시에, 키튼이 연기한 애니 홀의 독특한 패션으로 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스타일은 ‘애니 룩(Annie look)’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전 세계 여성의 옷장을 바꿨다. 아버지 옷장에서 꺼내 입은 듯한 오버사이즈 화이트 옥스퍼드 셔츠, 블랙 울 베스트, 헐렁한 와이드 팬츠, 볼드한 패턴의 넥타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그니처인 블랙 중절모를 쓴 키튼은 놀랍도록 매력적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영화 속 의상 대부분이 키튼 본인의 개인 소장품이거나 그녀가 직접 코디네이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코스튬 디자이너 루스 모리(Ruth Morley)는 애니의 스타일을 너무 ‘괴짜’ 같다고 여겨 반대했지만, 키튼은 자기 개성을 고집했고, 앨런 감독이 이를 허용하면서 패션사의 한 페이지가 쓰였다.
애니 룩의 대다수 아이템은 랄프 로렌 제품이었다. 키튼은 랄프 로렌의 남성복 요소를 빌려와 여성 몸에 걸치는 방식으로, 중성적인 미학을 우아하게 구현해 냈다. 동시에 이 스타일은 1970년대 여성해방운동 물결과맞물려, 시대정신의 상징이 됐다.
키튼의 애니 룩은 매니시 룩(mannish look)을 뛰어넘어, 성별의 경계를 허무는 급진적인 자유의 미학이다. 그녀는 남성복을 여성화하려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본연의 구조적인 실루엣 그대로를 즐겼다. 애니 룩의 센세이션 이후에도 그녀는 평생 레이어링의 대가로 사랑받았다. 셔츠 위에 베스트, 그 위에 재킷이나 트렌치코트 그리고 목을 감싸는 터틀넥 스웨터는 그녀의 시그니처 레이어링 공식이다. 헐렁한 실루엣은 여성적인 몸의 곡선을 감추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주체의 당당한 태도를 강조한다.
당시 남성에게 사회적 권위의 상징이었던 넥타이는 키튼을 통해 재미와 위트를 더하는 액세서리로 변모했다. 헐렁하게 매듭짓거나, 비비드한 패턴을 선택해 딱딱한 슈트 착장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또한,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볼러 햇(bowler hat·찰리 채플린이 썼던 둥근 돔형의 모자)이나 페도라(fedora· 중절모)가 젠더리스 룩의 하이라이트였다.
키튼은 나이 듦의 과정마저 스타일리시하게 옹호한 아이콘이다. 70대가 되어서도 그녀는 여전히 자기 스타일 철학을 고수하며,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해, ‘올드 해그 패션(old hag fashion·중년 이후 여성이 자신의 주름, 개성, 연륜을 스타일의 일부로 드러내는 패션 태도)’ 커뮤니티에서 절대적인 숭배를 받았다. 그녀는 여전히 오버사이즈 코트와 레이어링 그리고 볼륨 있는 실루엣을 즐겼다. 넓은 벨트로 허리를 조이고, 여러 겹의 진주를 두르며, 터틀넥 위에 또 다른 셔츠를 걸쳤다.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영화 ‘기생충’ 각본상 시상자로 올랐는데, 그때도 랄프 로렌의 블랙 터틀 넥, 체크 재킷과 코트의 레이어링, 블랙 중절모의 시그니처 룩을 입고 있었다. 키튼의 실제 인생 또한 자유로운 패션을 닮았다. 특히 알 파치노와 러브 스토리가 유명하다. 영화 ‘대부’에서 연인으로 출연하며 실제 사랑에 빠졌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두 배우는 연인으로만 남고 결혼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세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평생 비혼을 고수한 알 파치노는 2019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늘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다이앤은 예외였다. 그녀와 결혼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키튼은 딸 덱스터와 아들 듀크를 입양해 홀로 키웠다. 그러나 키튼에게 독신 생활은 고독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사는 자유를 선택한 독립적 싱글이었다. 키튼은 AARP(American Association of Retired Persons)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안다. 내 나이도, 한계도, 가능성도. 하지만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고백이 그녀의 인생이자, 스타일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