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벌거숭이두더지쥐. /사진 셔터스톡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포유류는 200세 이상 사는 북극고래(학명 Balaena mys-ticetus)다. 어떻게 북극고래는 그 추운 북극해에서 장수를 누리는 것일까. 과학자들이 그 비밀을 유전자에서 찾아냈다. 암(癌)을 유발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적고, 설사 돌연변이가 생긴다고 해도 바로 복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래 고장도 덜 나지만, 혹 망가지면 뚝딱뚝딱 고쳐가며 산다는 것이다.
미국 로체스터대 생물학과 베라 고르부노바(Vera Gorbunova) 교수, 안드레이 셀루아노프(Andrei Seluanov) 교수 부부와 알베르트아인슈타인의대 유전학과 얀 페이흐(Jan Vijg) 교수 공동 연구진은 “북극고래의 놀라울 정도로 긴 수명은 DNA 돌연변이를 복구하는 능력이 향상된 덕분임을 알아냈다”라고 10월 30일(이하 현지시각)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돌연변이 취약하나, 복구 능력 탁월
북극고래는 몸길이가 15~24m에 달하고, 몸무게는 80t을 넘는다. 지방 두께는 50㎝나 돼, 북극해의 차가운 얼음장 바다에서도 살 수 있다. 일반적으로 DNA 유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돌연변이가 쌓이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암도 발생한다. 덩치가 크고, 수명도 긴 북극고래 역시 DNA 돌연변이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극고래는 암 같은 노화 관련 질환에 잘 걸리지 않는다. 연구진은 북극고래가 암에 잘 걸리지 않는 이유를 세포의 특성에서 찾았다.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저온 활성화 단백질이 북극고래에게 있었다. 이 단백질은 북극고래 세포 속에서 추운 날씨에 자동차 엔진이 얼지 않도록 ‘부동액’을 넣어주는 것 같은 역할을 한다.
북극고래는 거대해 실험실에서 키우며 관찰하기 어렵고, 그만큼 연구하기 까다롭다. 멸종 위기종인 탓에 야생 연구도 쉽지 않다.
연구진은 북극 원주민인 이누이트족(族)에게 도움받았다. 매년 가을 미국 알래스카주 북부 이누이트족은 정부 허가를 받아 북극고래를 사냥한다. 이누이트족은 1000년 이상 북극해에서 북극고래를 잡아 왔다. 연구진은 이누이트가 잡은 북극고래에서 시료를 채취하고, 실험실에서 세포를 배양했다.
처음에는 북극고래가 오래 사는 것에 대해 암에 대한 저항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북극고래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는 데 필요한 발암 돌연변이 수가 인간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컨대 인간이 암에 걸리는 데 발암 돌연변이가 5개 필요하다면, 북극고래는 3개만 있어도 암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북극고래는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 발암 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원래 작기 떄문이다.
또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일단 돌연변이가 생기면 암이 발생할 가능성은 인간보다 크지만, 북극고래는 그런 돌연변이가 생기는 일 자체가 원천 봉쇄돼 있는 셈이다.
연구진은 또 북극고래 세포에서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데 CIRBP(Cold-Inducible RNA-Binding Protein·저온 유도 RNA 결합 단백질)가 핵심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 단백질은 북극고래가 사는 얼음 바다 같은 저온 환경에서 활성화된다. 북극고래는 CIRBP를 사람보다 100배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인간 세포에 CIRBP를 넣어주자, DNA 복구 능력이 향상됐고, 초파리 세포에 발현했을 때는 초파리 수명이 늘어났다. CIRBP는 DNA 돌연변이를 유발할 수 있는 방사선에 대한 저항성도 높였다. 초파리는 작은 곤충이지만, 인간과 유전자를 60% 공유해 생물학·의학 실험에 많이 쓰인다.
마오즈용(毛志勇) 중국 퉁지대 교수는 ‘네이처’에 “북극고래가 극도로 장수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라며 “이번 연구는 유전자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DNA 복구 메커니즘이 극단적인 장수를 가능케 하는 매우 효과적인 전략임을 보여준다”라고 했다. 마오 교수는 고르부노바, 셀루아노프 교수의 제자다.
벌거숭이두더지쥐도 DNA 복구로 장수
DNA 복구 능력이 장수 비결이라는 사실은 육지의 장수왕도 마찬가지다. 바로 땅속에 사는 벌거숭이두더지쥐(학명 Hetero-cephalus glaber)다.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벌거숭이두더지쥐는 몸길이가 8~10㎝, 몸무게는 30~35g이다. 이름 그대로 털이 거의 없어 겉보기엔 보잘것없지만 놀랍게도 수명이 32년에 달한다. 같은 크기 다른 쥐의 수명이 3년 남짓인 것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더 사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800년을 사는 셈이다.
마오 교수는 11월 10일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장수 비결은 외부 침입자를 감지해 면역반응을 유발하는 효소 cGAS(Cyclic GMP-AMP Syn-thase·고리형 GMP-AMP 합성효소)에 생긴 돌연변이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cGAS는 인간과 생쥐 세포핵 내에서는 DNA 복구를 억제하고, 유전자 돌연변이와 암 발병 위험을 높인다. 그러나 벌거숭이두더지쥐 세포에서는 이 효소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DNA 복구를 억제하지 않는다. 돌연변이 cGAS가 암을 막는 방패로 작용하는 것이다. 말썽꾸러기가 효자로 변신한 셈이다.
북극고래와 벌거숭이두더지쥐의 DNA 복구 능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할 수도 있다. 어쩌면 300년 넘게 산 북극고래가 있을지도 모른다. 호주 연방과학산업연구기구(CSIRO) 연구진은 2019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북극고래의 평균수명이 268년이라고 발표했다. CSIRO 연구진은 척추동물 252종의 유전자를 분석, 이 가운데 수명과 관련된 유전자 42개를 발견했다. 이를 바탕으로 동물 수명 시계를 만들었는데, 북극고래 수명은 기존 예상보다 57년 더 긴 268년으로 나왔다.
마오 교수는 “북극고래의 장수에 이바지하는 CIRBP가 인간에게도 도움이 될지 이해하려면, 이 단백질의 작용 원리를 밝힐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라며 “전체적으로 이번 연구 결과는 장수와 암 예방에 있어 DNA 복구중요성을 보여준다”라고 했다. 고르부노바 교수는 “이번 연구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에게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라며 “연구가 발전하면 인간 DNA 복구 능력도 향상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