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Sustainable Living'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유니레버. /사진 유니레버
GE의 대전환: 금융 제국에서 혁신 기업으로
2001년 9월, 잭 웰치의 후임으로 제프리 이멜트가 GE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했다. 당시 GE는 시가총액 5050억달러(약 736조2900억원)의 거대 제국을 이루었으나, 이멜트는 GE의 사업 구조와 소비자 인식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당시 GE의 매출 중 조명·가전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6~7%에 불과했고 항공 엔진, 의료 시스템, 발전 시스템 등의 사업을 미래 수종 사업으로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자 인식은 달랐다. 많은 소비자는 여전히 GE를 ‘전구 만드는 회사’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GE는 금융 부문, 특히 GE캐피털이 이익의 45%에 달하는 거대 금융 그룹이기도 했다. 이멜트는 GE를 거래 중심의 금융 기업에서 기술 중심의 산업 기업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그 변화의 상징이 바로 슬로건 변경이었다. GE는 BBDO 월드와이드와 함께 18개월간의 리서치와 테스트를 거쳐 ‘Imagination at Work’라는 슬로건을 도출했다. 이는 창의성과 혁신, 기술 중심의 비전을 담은 메시지였다. 1년 후 시장조사에서 응답자의 50%는 GE를 ‘역동적’ 기업, 40%는 ‘첨단 기술' 기업, 35%는 ‘혁신적’ 기업으로 인식했다. GE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는 “새로운 슬로건이 조직 내부의 집결 구호가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사업 전략 전환·위기 극복… 슬로건 변화의 동력
몇몇 글로벌 기업의 슬로건 변경은 단순히 광고 문구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사업 전략의 대전환을 반영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브랜드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역할까지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영국 석유 기업 BP(British Petroleum)는 2000년대 초 ‘Beyond Petroleum(석유를 넘어서)’이라는 슬로건을 도입하며, 재생 가능 에너지로 사업 다각화를 발표했다. BP는 석유화학에서 태양광발전, 풍력발전, 천연가스 등 저탄소 동력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또 전 세계 6개 대륙에서 유조차를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재도색해 ‘BP=Beyond Petroleum’이라는 메시지를 소비자에게 각인시켰다. 이는 산업구조의 전환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례로 남았다.
슬로건 변경으로 위기를 극복한 사례도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비행기 테러 사건으로 아메리칸항공은 큰 타격을 입었다. 테러에 사용된 두 비행기 모두 아메리칸항공 소속이었다. 아메리칸항공은 슬로건을 ‘We are an airline that is proud to bear the name: American(우리는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는 항공사다)’으로 변경해 브랜드 정체성 재확립과 자긍심 회복을 시도했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 세탁이 아닌, 위기 속에서 브랜드 본질을 지키며 신뢰를 회복하려는 전략적 접근이었다.
유니레버는 오랫동안 ‘Feel better, look great, and get more out of life(기분 좋게, 멋지게,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라)’라는 슬로건을 사용했으나, 2009년 폴 폴만 회장이 취임한 후 소비자 가치관 변화를 인식하고 ‘Sustainable Living(지속 가능한 일상)’이라는 슬로건을 도입했다. 신념 기반 소비자 등장에 발맞추어, 개인의 더 나은 삶에서 모두의 지속 가능한 삶으로 변화를 선언한 것이다.
슬로건 변화, 성공의 5가지 조건
슬로건 변경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이유와 준비 과정이 중요하다. GE, BP, 유니레버는 각각 사업 전략의 변화에 맞춰 슬로건을 변경했고 그 변화는 브랜드의 본질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변화에도 때가 있다. 리더십 교체로 경영 철학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때, 사업 구조 변화로 기존 슬로건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때, 심각한 위기로 브랜드 정체성을 재확립해야 할 때, 소비자 인식과 실제 사업 간 괴리가 커졌을 때는 슬로건을 바꿔야 한다.
슬로건은 서약… 언행일치의 진정성 보여야
슬로건 변화가 항상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슬로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언행일치의 진정성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슬로건만이 소비자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웰스 파고의 슬로건 ‘Together we’ll go far(함께 나아갈 것이다)’는 언어유희의 잘된 사례로 알려져 있다. ‘go far’는 회사 이름 ‘Fargo’를 거꾸로 배열한 것이다. 하지만 웰스 파고의 성공은 슬로건이 단순한 말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웰스 파고는 1970년대부터 리사이클링(재활용) 운동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도했으며 재활용 종이 수표 사용 등으로 환경보호에 앞장섰다. 슬로건은 그들의 경영 철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였다.
에어아시아의 슬로건 ‘Now Everyone Can Fly(이제 모두가 비행할 수 있다)’는 창업자 토니 페르난데스의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그는 말레이시아인의 6%만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현실을 문제 삼아, ‘나머지 94%를 위한 항공사’를 만들기 위해 2001년 파산 위기에 처한 에어아시아를 1링깃(약 270원)에 인수했다. 이후 비행기 동체에 슬로건을 새기고 항공 여행 민주화를 선언했다. 에어아시아는 11년 연속 세계 최고 저비용 항공사로 선정되며 약속을 지켰다.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맞춰 디지털 전환을 추구하는 가운데도 에어아시아의 슬로건, 핵심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슬로건은 브랜딩을 넘어서 기업의 미래 방향을 선언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내부 문화를 변화시키는 촉매제이며 고객과의 새로운 약속이다. 진정한 위대함은 슬로건의 변화가 아니라, 그 변화 뒤에 숨겨진 실제 행동에 있다. GE의 대담한 변신, BP의 사업 다각화, 드비어스의 78년 일관성과 BMW의 30년 진화는 각 브랜드가 슬로건 뒤의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슬로건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서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