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AI 산업의 최전선에는 미국과 중국이 서 있다. 이들은 막대한 자본과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갖춘 국가다. 대규모 모델을 직접 설계하고 학습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과 전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AI 혁명은 모델 구축에만 국한되지않는다. 이미 공개된 모델을 특정 나라·산업· 기업의 상황에 맞게 활용하고 필요한 기능을 미세 조정해 배포하는 활동 역시 AI 가치 사슬의 핵심이다. 이 단계는 비용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 하고, ① 오픈 소스 모델의 확산 덕분에 진입 장벽도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신흥 경제국도 자체적인 거대 언어 모델(LLM)이 없어도, 일정 수준의 데이터 인프라만 갖추면 AI를 통해 금융 포용, 행정 효율화, 교육·의료 서비스 개선에 즉시 AI를 적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기본 인프라가 전제돼야 한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 광범위한 모바일 인터넷 보급, 합리적인 데이터 요금제가 필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이동성과 신뢰 확보’다. AI 서비스는 개인과 기업의 금융 거래, 교육 이력, 소비 패턴 등 방대한 디지털 흔적을 토대로 작동한다. 이 데이터가 안전하게 수집되고 당사자의 동의 범위 안에서 서로 다른 기관과 플랫폼 사이를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개인정보 침해와 오남용을 막기 위한 정교한 규제 체계와 감독도 필요하다.
인도의 ② UPI는 이런 조건이 충족될 때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UPI는 은행, 전자 지갑, 핀테크 사업자가 단일 결제망에서 실시간 소액 결제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인프라다. 이 시스템 덕분에 노점상, 일용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디지털 결제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결제 기록이 축적되면, 기존 금융에 접속하지 못했던 사람도 AI 기반 신용평가를 통해 소액 대출(③ 마이크로 크레디트)에 접근할 수 있다. 설령 담보나 정규 근로계약이 없어도, 꾸준한 매출과 상환 이력이라는 데이터가 있으면 금융기관은 위험을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상거래와 온라인 플랫폼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AI는 판매 데이터, 고객 리뷰, 물류 정보를 분석해 중소기업이 어떤 상품을 어느 지역에 어떤 가격으로 공급해야 할지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업은 자사가 잘할 수 있는 시장에 집중할 수 있고 소비자는 더 다양한 선택지를 얻는다. 이는 단순한 편의 향상을 넘어서 내수 시장 확대와 생산성 향상,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기회는 금융·상업을 넘어 의료와 교육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AI 기반 진단 보조 시스템은 전문의가 부족한 지역에서 1차 선별 진료를 도와주고 원격 상담의 정확도를 높인다. 교육 분야에서는 AI 튜터가 학생의 수준과 속도에 맞춰 맞춤형 학습 자료를 제공한다. 모든 학생이 좋은 교실과 우수한 교사를 보유할 수는 없지만, 인터넷과 저렴한 기기가 보급된 곳이라면 누구나 다국어로 학습을 돕는 생성 AI(Generative AI)에 접근할 수 있다. 이는 한 국가의 장기 성장 잠재력을 결정하는 인적 자본 축적에 직접 기여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한 AI는 현장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로도 활용된다. 콜센터, 간호, 소프트웨어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어시스턴트가 경험 많은 숙련자의 노하우를 정리해 초보자에게 실시간으로 제시함으로써 교육 시간을 줄이고 업무 품질을 끌어올리고 있다. 신흥 경제국 입장에서는 숙련 인력 부족 문제를 완화하고 젊은 인구가 빠르게 역량을 키우도록 돕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물론 신흥 경제국이 AI 모델 구축 경쟁에서 선두를 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AI를 활용해 금융 포용, 서비스 접근성, 인적 자본 축적을 크게 개선한다면, 이는 성장과 발전의 질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다.
예컨대 카자흐스탄은 2024년 ‘인공지능 발전 콘셉트(2024~2029)’를 채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AI 플랫폼(National AI Plat-form)을 출범시켰다. 중앙 집중형 데이터·연산 인프라를 구축해 공공기관과 기업이 AI 서비스를 시험·도입하도록 지원하고, 정부 부처 전반에 걸쳐 AI 활용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 디지털 정부 포털의 AI 챗봇이 수백만 건의 민원을 처리하는 등 공직자들의 편의성을 높이고 업무 역량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AI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을 것인가’라는 공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AI를 우리 사회의 난제를 푸는 도구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많은 신흥 경제국이 이미 이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고 그 선택이 앞으로의 세계경제 지형을 바꿀 가능성이 크다.
Tip
① 소스 코드가 공개돼 누구나 무료로 보고, 수정하고, 재배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뜻한다. AI 분야에서는 모델 구조와 학습 방법, 가중치 일부를 공개해 전 세계 연구자와 기업이 자유롭게 개선·응용할수 있도록 한 모델을 가리킨다. 사용자는 특정 기업의 독점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맞춤형 AI를 구축할수 있다.
② 인도국가결제공사(NPCI)가 개발한 개방형 결제 플랫폼이다. 서로 다른 은행 계좌와 전자 지갑, 핀테크 앱이 하나의 공통 규칙과 네트워크를 사용해 즉시 송금·결제가 가능하게 한 시스템을 말한다. QR 코드나 휴대전화 번호만으로 거래할 수 있다. AI 기반 신용평가 및 핀테크 확산을 뒷받침하는 인프라로 평가된다.
③ 담보나 보증 없이 소액을 빌려주는 대출 제도다. 전통적인 금융시장에서 소외된 저소득층, 영세 자영업자, 농민 등을 대상으로 한다. 과거에는 대출 심사가 인력 중심이라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이제는 디지털 결제 기록, 매출 데이터, 상환 이력을 분석하는AI 신용평가가 등장하면서 더 넓은 계층에 지속 가능한 소액대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