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이하 현지시각) 막을 내린 미국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안니카 드리븐 바이 게인브리지 앳 펠리컨’은 시즌 막판 뜻밖의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손녀인 카이 트럼프가 스폰서 초청 선수로 출전하면서 ‘할아버지 찬스’ 논란이 번졌고, 소셜미디어(SNS)에서는 LPGA의 공정성에 대한 논쟁까지 확산됐다. 이로 인해 우승 경쟁과 타이틀 레이스 같은 본래의 주요 이슈가 밀려났다는 평가가 나왔다.
Z세대 인플루언서 카이, LPGA 중심에 서다
카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의 딸로, 틱톡·인스타그램·유튜브를 합쳐 900만 명이 넘는 팔로어를 가진 대표적 Z 세대(1997~2010년생, 디지털 감성으로 정체성을 찾는 세대) 인플루언서다.
2007년 5월 12일생인 카이는 플로리다주 더 벤저민 스쿨에 재학 중으로, 각종 주니어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골프 실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가족 소유의 클럽 챔피언 우승을 제외하면 지역 대회나 국제 대회에서 상위권 입상 기록은 드문 편이다. 내년 가을부터는 마이애미대 여자 골프부 선수로 뛸 예정이다. 하지만 SNS의 영향력은 이미 정상급 LPGA투어 선수를 능가할 정도다. 올해 초 테일러메이드와 NIL 계약(선수의 이름·얼굴·이미지를 기업이 활용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자신의 이름을 단 의류 브랜드도 론칭했다. 백악관 잔디밭에서 해당 의류를 입고 찍은 사진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유튜브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라운드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영상, 라이더컵을 함께 관전하는 모습 등이 올라와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이런 폭발적인 화제성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AJGA(미국 주니어골프협회) 랭킹 461위라는 성적의 여고생 골퍼가 세계 최정상급 프로가 모이는 대회에 초청되자, X(구 트위터)·인스타그램·레딧(Reddit) 등 SNS에서는 곧바로 ‘네포티즘(nepotism)’이라는 표현이 급속히 퍼지며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주니어 랭킹 461위가 어떻게 LPGA 최강 필드에 ‘마법처럼’ 들어가냐?”
“그녀 이름이 ‘카이 스미스’였으면 누가 스코어 카드라도 봤겠나.”
“유튜브 조회 수가 실력보다 중요한 시대인가. 이게 지금 여성 골프의 현주소인가.”
“좋은 아이인 건 알지만 이건 순수한 네포티즘이다. LPGA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대회 주최자인 여자 골프의 전설 안니카 소렌스탐에게도 화살이 향했다.
“소렌스탐은 예전엔 탁월함의 상징이었는데, 이제는 ‘셀럽 클릭 장사’의 상징이 됐다.”
네포티즘은 중세 가톨릭교회 고위 성직자가 조카에게 성직을 세습하던 관행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라틴어 ‘nepos(조카·후손)’에서 비롯됐으며, 오늘날에는 정치·재계·연예·스포츠 전 영역에서 가족 또는 사적 인연을 통해 특권이 배분되는 구조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됐다. 미국 프로농구(NBA) 스타 르브론 제임스의 아들 브로니 제임스가 대학과 NBA 지명 과정에서 실력 이상으로 관심과 기회를 받았다는 비판 또한 대표적 스포츠 네포티즘 사례로 언급된다. 하지만 팔로어 수가 곧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는 SNS 시대는 이런 논란을 더욱 복잡하게 한다.
카이의 출전을 두고 미국 골프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트럼프 손녀의 데뷔와 미국 여자프로농구(WNBA) 스타 케이트린 클라크의 프로암 출전이 겹치며 최근 LPGA에서는 보기 드문 관심을 모았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AJGA 랭킹 461위 선수가 시즌 막판의 중요한 출전권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는가”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소렌스탐은 “이 소녀에게 기회를 주자”며 초청 결정을 강하게 옹호했다.
“카이는 골프에 관심이 없던 새로운 사람을 이 스포츠로 데려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대회는 단순히 성적을 위한 무대가 아니다. 경험을 제공하고 젊은 선수를 성장시키며 더 많은 여성이 더 많은 기회를 얻는 것이 우리의 가치다”라고 덧붙였다.
초청권을 행사한 펠리컨 골프클럽의 댄 도일 주니어 구단주 역시 “그녀 덕분에 SNS 관심도가 폭증했다. 카이는 900만 명 넘는 팔로어를 가진 선수”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LPGA와 대회 조직위원회도 “스폰서 초청은 관심을 끌어 새로운 시선을 유입시키는 장치이며 카이는 젊은 세대와 LPGA를 연결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 11월 11일 미국 플로리다주 벨에어에서 열린 LPGA 대회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손녀 카이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AP연합
3 9월 26일 미국 뉴욕주 파밍데일의 베스페이지 블랙 골프 코스에서 열린 라이더컵 대회에 트럼프 대통령과 손녀 카이 트럼프가 참석하고 있다. /사진 AP연합
참가자 108명 중 꼴찌로 컷 탈락
정작 카이의 경기력은 냉정한 현실과 기대를 모두 보여줬다. 그는 플로리다 주 벨에어 펠리컨GC(파70)에서 열린 대회 첫날 보기 9개, 더블 보기 2개를 묶어 13오버파 83타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경기 후 “작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연설했을 때보다 훨씬 긴장됐다”고 말했다. 초반 네 홀 연속 보기, 후반의 두 차례 더블 보기, 17번 홀에서의 ‘탑핑’ 아이언 샷 등 난조가 이어졌다.
그러나 2라운드에서는 버디 4개, 보기 4개, 더블 보기 1개, 트리플 보기 1개를 기록하며 5오버파 75타로 크게 반등했다. “첫날에는 압도됐지만 오늘은 침착했다”는 평가처럼 버디 4개를 잡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즐겨라, 긴장하지 마라”, 우즈는 “흐름에 맡겨라(go with the flow)” 라고 조언했고, 카이는 “실수 후 마음을 다잡을 때 우즈의 조언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최종 합계 18오버파로 108명 중 108위에 머물러 컷 탈락했으나, 2라운드만 놓고 보면 공동 103위로 더 이상 ‘압도적 꼴찌’는 아니었다. 시부노 히나코(일본), 릴리아 부(미국) 등도 75타를 기록했다. 마지막 18번 홀에서는 3번 우드로 홀컵 약 2.4m에 붙이는 정교한 세컨드 샷을 선보였고, “할아버지에게 그 샷을 자랑하고 싶다”고 말했다.
갤러리는 이틀 내내 그를 따랐다. 골프채널은 “대회 최대 규모 갤러리”라고 표현했다. 지지자, 회의론자, 단순 구경꾼까지 각기 다른 이유로 모여든 모습은 논란의 무게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카이는 “이번 대회 이후 대학에서도 적용할 만한 깨달음이 있느냐” 는 질문에 “준비의 중요성을 느꼈다. 항상 긴장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면 긴장을 완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은 단순히 ‘트럼프 손녀’라는 개인적 이슈를 넘어, 여성 골프의 구조적 제약과 시장 확대 전략, 스타 시스템 구축, SNS 시대의 공정성 논쟁을 한꺼번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카이의 두 라운드는 끝났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앞으로도 LPGA를 따라다닐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