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셜미디어(SNS) 단체방에서 어떤 말을 할 때는 무척 조심스럽다. 이념이나 이익 때문에 모인 단체가 아니라, 할아버지뻘에서부터 손주 세대까지 수백 명이 모인 대학 단과대학이나 학과 동창 모임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순수한 의도로 가볍게 올린 글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판단하고 정죄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의 주장 중에 받아들이기 불편한 것이 있다면, 메시지 자체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아니라 메신저를 공격하기도 한다. ‘꼰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꼰대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일으킨 파장은 크다. 단순한 세대 비판을 넘어 이미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프레임이 되었다. 기성세대의 권위적 태도를 향한 날카로운 외침으로 시작된 이 표현은 시간의 강을 건너며 점점 더 복잡해졌다. 올해 실시한 어떤 조사에 따르면, 전 연령대의 80% 이상이 세대 갈등을 심각하게 인식하며 젊은 세대일수록 세대 갈등의 피해자가 자신이라고 여기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이 프레임 속에는 단순한 세대 차이 이상의 것이 숨 쉬고 있다.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한 다양한 심리적 방어기제와 인지적 편향 그리고 각자가 성장해 온 환경의 흔적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세대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 모두의 내면 풍경을 천천히 거닐어보는 여정이기도 하다.
‘꼰대 프레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아름다우면서도 씁쓸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주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증 편향’이라 부른다. 만약 기성세대가 권위적이라는선입견이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그들의 모든 행동은 그 렌즈를 통해 채색된다. 몇몇 사람의 부정적인 모습이 어느새 전체 세대의 초상화로 과잉 일반화되는 것이다.
원시시대 이래로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해야 할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류의 뇌는 자신이 가진 기존 믿음에 부합하는 정보를 우선수용함으로써 판단 시간을 줄이고 위험을 최소화해 왔다. 진화심리학자들의 말이다. 예컨대 하이에나 무리가 출현했을 때 무기를 들고 방어에 나서야 할지, 도망을 가야 할지, 간다면 어디로 가야 생존에 유리할지 판단하는 것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그때는 자신의 평소 경험에 비추어 즉각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말하자면 확증 편향은 생존을 위한 인류의 본능적 몸짓이었다는 말이다.
다른 집단과 차이 부각해 존재 확인
사회 정체성 이론(Social Identity Theory)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집단과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정체성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젊은 세대가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유연한’ 내부 집단(in-group)으로 정의하고 기성세대를 꼰대라는 외부 집단(out-group)으로 갈라치는 과정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리듬의 일부일 수 있다.
더 깊은 수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이는 자신이 직면하기 어려운 내면의 모습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방어기제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이를 ‘그림자(shadow)’라고 불렀다. 자기 안에 있는 권위적인 면모나 변화에 대한 저항을 인정하기보다 그것을 외부의 누군가에게서 발견하고 비판하는 것은 마음이 선택한 더 편안한 피난처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관찰이 있다. 과도한 보호와 우대 속에서 성장한 세대가 보이는 독특한 심리적 결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한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는 칭찬과 긍정의 온실 속에서 소황제처럼 자란 이들은 역설적으로 비판이라는 서늘한 바람에 더 취약할 수 있다. 실수를 경험하고 극복하며 단단해질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에 타인의 조언을 성장의 씨앗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정원을 위협하는 침입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여기에도 과잉 일반화 오류는 있을 수 있다. 단지 평균적인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꼰대를 넘어 ‘개저씨’ 같은 표현이 등장하면서 이 현상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 낙인 찍기라는 어두운 숲으로 들어섰다. 낙인 찍기는 대상의 다면적 특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축소시킨다. 이는 개인의 존엄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소통의 샘물 자체를 말려버린다.
낙인이 찍힌 사람은 자신감을 잃고 소외감이라는 섬에 갇힌다. 더 안타까운 것은 때로 그들 스스로가 그 낙인에 맞춰 행동하게 되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저주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낙인 찍기는 권력관계의 불균형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자신의 가치관을 ‘정상’이라는 햇빛 아래 두고 상대를 ‘비정상’이라는 그늘로 밀어냄으로써,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다.
일시적 우월감은 깊은 열등감에서 기인
흥미롭게도 이러한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낙인을 찍는 이들의 내면에서는 또 다른 서사가 펼쳐진다.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일시적인 우월감을 얻으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깊은 열등감과 자신감 부족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복잡한 인간관계의 정원을 섬세하게 가꾸는 대신, 상대를 프레임이라는 우리 안에 가두고 관계의 다리를 태워버리는 것은 미숙한 사회성 기술의 그림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프레임의 바람 앞에서 기성세대는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의 평가라는 풍랑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쌓아온 경험의 탑을 인정하되, 그것이 절대적 진리의 등대는 아님을 아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또한 정서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는 능력도 귀한 자산이다. 모든 비판을 인격 공격의 화살로 받아들이기보다 상대방의 반응 이면에 흐르는 심리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내면이라는 정원을 거닐며 살펴보는 용기, 융이 말한 그림자를 직면하고 통합하는 과정은 결코 평탄하진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숙으로 가는 길이다.
변화하는 시대의 물결에 발맞춰 배우려는 자세, 조언이라는 화살보다는 질문이라는 다리로 대화하는 방식, 다른 의견을 정원의 다른 꽃처럼 존중하는 태도. 이러한 것이 차곡차곡 쌓일 때 불필요한 프레임은 아침 안개처럼 자연스럽게 흩어지지 않을까.
꼰대 프레임은 결국 세대 간 소통의 다리가 끊어진 자리에서 개인 및 집단의 심리적미성숙이라는 씨앗이 만나 피워낸 가시나무의 꽃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투사와 편향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기성세대의 다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기성세대는 시대의 변화라는 물결을 받아들이되, 외부의 낙인이라는 파도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져야 한다.
진정한 소통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 즉 상대방과 공감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그림자를 포옹하며 함께 성장하려는 의지, 그것이 프레임이라는 감옥을 넘어 공존이라는 열린 들판으로 가는 유일한 오솔길이다. 지금은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세대를 아우르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