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포리 풍력발전 단지. /사진 최갑수
창포리 풍력발전 단지. /사진 최갑수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문득, 아무런 예고 없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거창한 이유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아닌 다른 곳의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원초적인 욕망. 나는 그럴 때마다 동해의 7번 국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길의 허리춤쯤에 무심하게 그러나 다정하게 놓여 있는 영덕을 생각한다.

많은 이가 영덕이라고 하면 붉은 대게의 등딱지와 새해 첫날의 일출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영덕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둠이 내린 밤바다 위로 휘영청 떠오르는 달과 그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푸른 파도 그리고 뜻밖의 골목에서 만난 불고기 한 점에 대해서 말이다.

최갑수 -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최갑수 -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달빛을 마시는 시간, 창포리 풍력발전 단지

바다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을, 그것도 아무런 방해 없이 온전히 마주해 본 적 있는지. 수평선 너머에서 붉고 큰 달이 밤바다를 환하게 밝히며 솟아오를 때, 그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는 누구나 말을 잃게 된다. 만약 당신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사랑을 말하지 않아도 슬며시 손을 잡게 될지도 모른다.

영덕의 밤을 가장 낭만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은 창포리 풍력발전 단지다. 강구항 북쪽 언덕,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거대한 바람개비가 서 있다. 본래 1997년 큰 산불이 났던 자리인데, 불이 마을 앞에서 기적처럼 멈춰 섰고 그 덕에 나무를 베어낼 필요 없이 이 거대한 풍력발전 단지가 들어섰다.

불행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희망이 싹튼 셈이다. 여행도,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곳은 낮보다 해 질 무렵이 좋다. 하늘이 쪽빛에서 보랏빛으로, 다시 짙은 군청색으로 물들어 갈 때쯤 가로등이 켜진 산책로를 걷는다. ‘영덕 블루로드’의 일부이기도 한 이 길은 험하지 않아 운동화 끈을 조여 매지 않아도 좋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발전기가 ‘웅~ 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 들어온 듯한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면, 수평선 가득 오징어잡이 배가 켜놓은 집어등이 별처럼, 혹은 또 다른 달처럼 빛나고 있다. 하늘에는 진짜 달이, 바다에는 배들이 만들어낸 달이 떠 있는 환상적인 풍경. 그 앞에서 나는 종종 내가 도시에서 안고 온 고민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를 깨닫곤 한다.

(위) 영덕 스카이워크 (아래) 삼사해상공원 /사진 최갑수
(위) 영덕 스카이워크 (아래) 삼사해상공원 /사진 최갑수

바다 위를 걷는 기분, 영덕 스카이워크

달맞이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 혹은 다음 날 아침 삼사해상공원 쪽으로 향하다 보면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뻗어 나간 다리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영덕 스카이워크(삼사해상산책로)’다. 바다 위를 걷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 산책로는 해수면에서 그리 높지 않게 설치되어 있어, 파도가 넘실거리는 그 역동적인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진 길을 따라 걸으면 발아래로 투명한 바닥을 통해 검푸른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파도가 거친 날에는 바닷물이 뺨을 때리기도 한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다리 끝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뱃머리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나는 파도에 실려 보내고 싶은 지난날의 후회를 그곳에 털어놓곤 한다. 바다는 말이 없고, 그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파도로 대답해 줄 뿐이다. 그 단순한 위로가 때로는 100마디 말보다 더 깊게 다가온다.

7번 국도의 낭만과 고래불의 백사장

영덕의 매력은 결국 ‘바다’로 귀결된다. 강구항에서 7번 국도와 918번 지방도를 번갈아 타고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약 40㎞에 이르는 해안 드라이브 코스가 이어진다. 길 양옆으로는 바다와 작은 포구, 언덕과 마을이 번갈아 나타난다.

강구항은 말 그대로 대게 천지다. 겨울 햇살이 내려앉은 포구에는 붉은 간판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커다란 수족관에서 대게가 다리를 꼼지락거린다. 아침이면 공판장에서 경매가 열린다. 수협 공판장 바닥에 크기별로 줄지어 놓인 대게, 그 사이를 오가며 가격을 외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활기를 더한다.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가 제철, 속이 꽉 찬 영덕산 대게에는 어선 이름이 적힌 태그가 붙어 있어, 고향이 분명하다.

(왼쪽부터) 강구항, 영덕대게. /사진 최갑수
(왼쪽부터) 강구항, 영덕대게. /사진 최갑수

강구항을 벗어나면 해안도로는 조금 더 한적해진다. 대탄·노물·경정·축산·대진리 같은 크고 작은 포구가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 준다. 오른쪽 차창 밖으로는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왼쪽으로는 산과 마을이 따라붙는다. 가끔 길가 철조망에는 가지런히 걸린 오징어가 바람을 맞으며 말라가고 있다. 햇볕에 반짝이는 수백, 수천 마리의 오징어는 하나의 설치미술 작품 같다.

차를 달리다 멈춘 곳은 고래불해수욕장. ‘고래불’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 대학자 이색이 이곳 앞바다에서 고래가 하얀 물을 뿜으며 노는 것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8㎞나 이어지는 백사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모래는 밀가루처럼 곱고, 바다는 투명하다. 나는 이곳을 걸으며 헝클어진 마음을 다림질한다. 걷는다는 건,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치유 행위니까.

해안선을 따라 걷고 싶다면, ‘영덕 블루로드’를 추천한다. 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도보길 중 석리어촌마을에서 축산항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2시간 남짓, 바다와 마을 풍경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코스다. 축산항 어귀에서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행수첩

강구항에 가면 100여 개의 대게 집이 호객을 하고, 찜기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살이 꽉 찬 대게의 감칠맛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아성불고기’에도 가 보자. “바닷가까지 와서 웬 불고기냐”고 묻는다면, “일단 한 번 잡숴봐”라고 말할 수밖에. 영덕군청 근처에 자리한 이 집은 겉보기엔 평범한, 아니 조금은 허름해 보이는 노포(老鋪)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고소하고 달큼한 육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이곳 메뉴는 단 하나, 한우 불고기다. 1등급 한우만을 사용하는데, 주문 즉시 고기를 썰어 양념에 버무려 낸다. 미리 재워두지 않아 고기의 선홍빛 색감이 살아 있고 육질이 무르지 않는다. 옛날식 화로에 석쇠를 올리고 고기를 굽는다. 참숯 향이 배어든 불고기는 입안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 집에는 달걀노른자를 띄운 간장 소스가 나오는데, 잘 익은 불고기를 달걀노른자에 푹 찍어 먹으면 고소함이 배가 된다. 달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 채소와 당면을 넣어 자작하게 끓여 먹는 서울식 불고기와는 또 다른, 석쇠 불고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최갑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