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키우던 강아지가 있었다. 순백처럼 하얀 몰티즈였다. 한때 온라인상에서 ‘몰티즈는 참지 않아’라는 밈이 유행했는데, 목욕을 시킬 때면 그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작은 몸으로 ‘하찮게’ 으르렁거리곤 했다.
그래도 평상시 모습은 더없이 온순하고 귀여웠고, 늘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집 안 어디서나 그림자처럼 함께했다. 이름은 ‘예솔이’ 라고 붙였다. 사람 이름 같아서인지, 산책을 나가 저 앞에서 깡충깡충 뛰놀던 예솔이를 향해 “예솔아!” 하고 부르면 멀리서 누군가가 “네?” 하고 뒤돌아보는 일이 가끔 있었다.동명이인이었겠지만, 강아지를 부른 목소리에 사람이 대답해 버린 셈이니 그때마다 괜히 멋쩍고 웃음이 났다.
지금은 무지개다리 너머 어딘가에서 뛰어놀고 있겠지만, 예솔이와 우리 가족의 관계는 쉽게 말해 이런 것이었다. 사랑을 주면 줄수록 더 많이 돌아오고, 아무리 주고받아도 넘치지 않고 그 그릇이 오히려 더 커지는 관계.
'이 정도 거리는 괜찮아'
비슷한 시기 오스트리아에서 사사하던 지도 교수에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K.279)을 들려준 적이 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해 갔지만, 지도 교수의 첫마디는 이랬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도대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레슨은 10여 분 만에 끝났다. 그다음 주도, 그다음 주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잘 모르겠네. 다시 연습해 오게.”
결국 3주 연속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며 레슨실을 나와야 했다. 그때의 기분은, 말 그대로 레슨실에서 쫓겨나는 것 같았다.
이 모차르트의 소나타는 참 밝고 경쾌한곡이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쁨이 차오르는 작품이지만, 그만큼 음도 많아서 감정이 조금만 부족하면 그냥 시끄러운 음의 나열처럼 들릴 가능성도 크다. 지도 교수가 느끼기에는 내가 표현하는 기쁨이 너무 얕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네 번째 레슨마저 같은 식으로 흘러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모차르트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기쁨은 어떤 것일까?’
꽃이 만발한 봄, 눈부신 햇살이 잘츠부르크 옛 시가지 골목골목을 비추고, 그 골목을 따라 연인이 사랑을 노래하듯 걷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이미지를 붙들고 일주일 내내 연습했다. 사랑에 들뜬 오페라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발끝에서 손끝까지 에너지를 쥐어짜며 기쁨을 모든 음에 간절히 담아보려 했다.
드디어 네 번째 레슨에서 다시 그 곡을 연주했다. 곡이 끝나자, 지도 교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자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조금 알 것 같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들려야 하네.”
한 달간 들은 말 중 가장 큰 칭찬이었다. 그 이후 이 소나타에 더 많은 기쁨과 사랑을 담으려 했고, 그때마다 이 곡도 내게 그만큼의 기쁨을 돌려주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이 소나타를 떠올리면 마음이 들뜰 정도이니,그 시절 연습이 헛되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로부터 다시 시간이 한참 흐르고, 독일 브레멘음대에 진학해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프렌치 하프시코드, 바로크 음악의 정수, 프랑수아 쿠프랭의 마지막 모음곡인 오르드르 제27번을 공부했다. 쿠프랭의 가장 후기 작품이자, 그의 하프시코드 예술이 응축된 모음곡이라 할 수 있다. 다소 쓸쓸하고, 조금은 슬프고, 어느 순간은 미묘한 기쁨과 격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곡이다. 이 작품을 연습하며 내가 가진 사랑과 슬픔, 눈물을 모두 담아냈다고 생각했다.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할 때처럼 감정을 더 많이, 더 진하게 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연주를 다 들은 지도 교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말하려는 바는 알겠네. 하지만 연주를 듣는 내내 자네의 감정이 나에게 강요되는 느낌이어서 솔직히 불편했다네. 때로는 감정을 마음속에 품고만 있어도, 오히려 더 잘 전달될 때가 있네. 굳이 목소리로 울부짖지 않아도 말일세.” 그 말을 듣는 순간, 모차르트와는 정반대 요구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양이와 관계가 떠올랐다. 고양이는 아무리 ‘좋아한다’며 다가가도 그만큼 멀어졌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뒤에야 조용히 옆에 와 주었다. 쿠프랭 작품도 비슷했다. 너무 예민하고 섬세하고 다소 내향적인 음악이라 감정을 모두 밖으로 꺼내 놓기보다 마음에 품고, 손끝으로 아주 살며시 건반에 닿아야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는 곡이었다. 그렇게 연주하기 시작하자, 이 음악은 어느 날부터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길을 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크게 울리는 감동이 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스며들어 어느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림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말이다.
어느 정도 거리 둬야 할까
반려동물과 관계, 모차르트와 쿠프랭을 배우며 겪었던 레슨. 지금 돌아보면 결국 모두 같은 질문으로 모이는 것 같다. ‘나는 이 존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할까?’
사람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친한 친구, 동료, 가족이라고 해서 언제나 같은 거리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상대 상황, 마음 상태, 우리가 처한 환경에 따라 필요한 간격은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항상 이렇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와 상대를 보면서 조금씩 거리를 조절하는 감각일 것이다. 독일 사람은 어떤 결정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한다. ‘Vertrau, deinem Bauchgefühl.’ 자신의 감각을 한번 믿어보라는 뜻이다. 머리로 계산하는 거리 말고, 이 관계에서는 지금 조금 더 다가서야 할지, 아니면 한 걸음 물러서는 편이 나을지, 그때그때 몸안에서 올라오는 작은 신호를 한번쯤은 믿어보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자주 흔들리고, 가끔은 거리를 잘못 재기도 한다. 음악 안에서, 인간관계 안에서, 내 삶 안에서 여전히 방황한다. 하지만 강아지와 고양이, 모차르트와 쿠프랭에게서 배운 것은 그 흔들림 자체가 전혀 쓸모없는 경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만의 ‘적당한 거리’를 찾아가는 것. 어쩌면 그게 음악을 배우는 일이고, 사람과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