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열 크로스펏 대표가 12월 4일 제62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100만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사진 올댓골프
국산 퍼터 브랜드가 세계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다. 스코티 캐머런, 핑, 오디세이 등 글로벌 골프 브랜드가 사실상 시장을 장악한 구조에서 한국 브랜드는 ‘끼어들 틈이 없다’는 말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현대차 디자인 개발을 이끌었던 박충열 크로스펏(CROSSPUTT) 대표가 그 상식을 흔들고 있다. 일본 시장에서 연간 100만달러(약 14억7070만원) 수출 실적을 올려 12월 4일 ‘100만불 수출의 탑’ 수상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의 도전은 무모함에서 출발했다. 현대차 엔진 디자인을 담당했던 그는 기술과 조형을 동시에 다루는 ‘엔지니어 디자이너’다. 평생의 경력을 바친 자동차 디자인 회사를 접고, 환갑을 앞둔 나이에 퍼터 브랜드를 만들겠다고 나섰을 때 주변 반응은 냉담했다. “100명이면 100명 모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다. 왜 하필 퍼터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우연이 아닌 확신에서 나왔다. 지인 권유로 시작한 골프에서 그는 퍼팅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디자인 능력을 결합한 실험을 반복했다. 블레이드 퍼터를 직접 자르고 붙이며 밸런스와 에이밍, 터치감을 연구했다. 자동차 엔진 설계에 쓰이는 동역학 시뮬레이션을 퍼터 헤드 무게와 스윙 궤적 분석에 도입했고, 이러한 공학적 접근은 크로스펏만의 차별화된 아이덴티티가 됐다.
그 출발점이 된 기술이 바로 ‘듀얼 얼라이먼트 라인’이다. 퍼터 넥의 가늠자 라인과 헤드 상단 가늠쇠 라인을 정렬해 시각적으로 안정된 에이밍을 제공하는 이 방식은 일본 골퍼의 취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박 대표는 “일본 골퍼의 섬세함과 정밀함에 크로스펏이 적합했다”며 당시 반응을 떠올렸다.
크로스펏은 2018년 미국 올랜도 PGA쇼 참가를 시작으로 해외시장 접근을 시도했다. 미국, 일본, 한국에서 크라우드 펀딩은 의미 있는 성과를 냈고, 특히 일본 바이어의 관심이 폭증했다. 현재 크로스펏은 일본으로만 연간 100만달러(약 14억7000만원) 이상을 수출하며 안정적인 판매망을 구축했다. 그는 “일본에서 통한다면, 세계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며 “유럽 바이어와 소통도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크로스펏 일본 진출을 결정적으로 견인한 것은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2023년 스텔스 2.0 모델은 일본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서 3억5000만원을 넘어서는 기록적인 모금액을 달성하며, 골프 퍼터 카테고리 단일 프로젝트 최고 성과를 세웠다. 여기에 2014년 블랙 레드 라벨 모델이 기록한 5억원 규모 펀딩 성공이 더해지면서 일본 시장에서 브랜드 존재감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박 대표는 2025년에도 CP-400 모델(국내 미출시)을 선보여 6억3000만원이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우며, 일본 내 입지를 확고히 했다. 새로운 개념의 퍼포먼스 구조가 일본 골퍼의 감성과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는 일본 최대 골프 전시회인 JGF(일본골프페어) 참가를 통해 브랜드 신뢰도를 끌어올렸고, 일본 유명 프로와 JPGA 공식 클럽 계약을 체결하며 기술력과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 모든 과정은 크로스펏이 ‘일본에서 먼저 인정받은 국산 퍼터 브랜드’라는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시장 흐름도 변화하고 있다. 박 대표는 “예전엔 무조건 해외 유명 브랜드만 찾고 국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실력과 제품력만 있다면, 국내 브랜드도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시대다. K-푸드, K-뷰티 등이 좋은 사례다. 성수동 팝업존을 보면, 소비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퍼터 진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스텔스2.0과 포뮬러 1.0에 이어, 그는 시뮬레이션 기반 로우토크 구조 설계로 스윗스폿의 범위를 과학적으로 확장했다.
크로스펏의 기술적 진화는 ‘버티컬 라인’ 개발로 한 단계 더 도약했다. 기존 듀얼 얼라이먼트 라인이 좌우 정렬 중심의 시각적 조준 성능을 강화했다면, 버티컬 라인은 퍼팅의 근본 요소인 볼 위치 수직 정렬까지 정확하게 잡아주는 장치다. 퍼팅 어드레스 시 눈–볼–목표선을 동일 추적선에 올려놓기 어렵다는 아마추어의 비기능적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박 대표는 자동차 엔진 설계에서 활용하던 동역학적 관찰 기법을 적용했다. 그 결과 버티컬 라인은 퍼터의 넥과 페이스 상단을 관통하는 하나의 직선 기준점을 만들어 볼 중심을 안정적으로 시각화하는 기능을 구현했다. 일본 테스트 골퍼는 “어드레스가 고정되니 스트로크가 흔들리지 않는다” 고 평가했다. 이 기술은 크로스펏을 단순 디자인 퍼터가 아닌 ‘정밀 공학 기반 퍼터’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최근 유행하는 ‘제로 토크 퍼터’와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제로라는 표현은 사실 과장에 가깝다. 중요한 건 스폿에서 벗어났을 때의 공의 직진성이고, 크로스펏은 삼각 구조를 통해 설계적으로 그 부분을 보완한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크로스펏을 단순한 퍼터 브랜드가 아닌 ‘퍼팅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퍼팅 매트, 퍼터 스탠드 등 관련 제품도 이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퍼터는 골프장에 가야만 만지는 클럽이 아니다. 사무실, 거실, 카페에서도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브랜드 확장 전략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한국 골프 산업은 세계적인 선수를 배출하고도 아직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국산 골프용품 브랜드’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시작한 크로스펏의 도전은 그 변화의 신호탄일 수 있다.
자동차 엔진을 설계하던 디자이너가 장인의 마음으로 퍼터를 깎아 세계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의 말에는 단순한 사업가의 목표가 아니라 인생 후반전에 던지는 결연한 각오가 담겨 있다.
“남은 인생, 퍼터에 걸겠다. 한번 제대로 세계 무대에서 한국 브랜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